꽃은 피었으되 봄은 오지 않았다(春來不似春). 중국 한나라의 왕소군이 흉노의 땅에서 느꼈던 그 시린 계절의 어긋남이, 오늘날 대한민국 서민들이 마주한 경제적 현실과 묘하게 겹쳐진다. 사상 최대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는 뉴스 속보와 연일 치솟는 외식 물가판 사이의 거리는 서울과 흉노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아득하다. 지표는 분명 따뜻한 봄날의 초입을 가리키고 있건만, 서민들의 지갑과 골목상권의 체감 온도는 여전히 매서운 한겨울의 칼바람 속에 머물러 있다.
최근 발표된 거시경제 지표들은 얼핏 풍요로운 잔칫상을 연상케 한다. 정부 발표 등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지난 2026년 5월 28일 수정 경제전망을 발표하며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0%에서 2.6%로 0.6%포인트나 대폭 상향 조정했다. 재화수출 증가율 전망 역시 함께 올려 잡았다. 반도체를 필두로 한 IT 경기 회복과 글로벌 수요 증가가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증거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대한민국 경제는 완연한 회복세를 넘어 순항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숫자의 성찬(盛饌) 뒤에는 온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시장 골목의 상인들에게 "성장률 2.6%"라는 숫자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누적된 고물가와 고금리의 이중고는 서민들의 실질 구매력을 처참하게 갉아먹었다. 월급봉투의 상승분은 밥상머리 물가의 가파른 오름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매달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는 가계의 숨통을 조인다. 지표의 풍요 속에서 정작 쓸 돈이 없어 소비를 줄여야 하는 역설적인 빈곤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수출이 먼저 살아나고 그 온기가 시차를 두고 내수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경제의 자연스러운 선순환 구조라고 주장한다. 거시적 성장이 담보되어야 미시적 분배와 복지도 가능하므로, 현재의 지표 개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는 논리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기초체력이 고갈된 경제 체제에서는 그 어떤 처방도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구조는 과거와 다르다. 대기업의 수출 호조가 중소기업과 가계의 소득 증대로 이어지던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의 파이프라인은 이미 오래전에 녹슬고 막혀버렸다.
동양의 고전 《관자(管子)》에는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는 말이 나온다. 민생의 안정 없는 국가의 번영은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수출 대기업의 호실적이라는 '창고'는 가득 차 가는데, 서민들의 '식탁'은 갈수록 궁핍해진다면 그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표의 착시에 가려져 민생의 경고음을 듣지 못한다면, 경제의 하부구조를 지탱하는 내수 시장은 회복 불능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숫자의 화려함에 취하는 자축이 아니라, 온기가 닿지 않는 음지를 돌보는 정교한 정책적 온정이다. 정부와 정책 당국은 거시 지표의 호조에 안주하지 말고, 소상공인 지원과 취약계층의 실질 소득 보전을 위한 핀셋 지원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막힌 낙수효과의 물길을 터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내수 활성화 방안이 병행되어야만 비로소 경제의 온기가 사회 전반으로 골고루 퍼질 수 있다.
기상청의 봄 예보가 아무리 따뜻해도, 마당가에 내려앉은 잔설(殘雪)이 녹지 않았다면 아직 겨울이다. 서민들의 차가운 손끝에 온기가 전해질 때, 비로소 우리의 봄은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