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의 한 탑골공원 인근 카페. 은퇴한 지 5년이 지난 김모(68) 씨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다. 화면에 가득한 것은 빨갛고 파란 숫자들이 교차하는 주식 거래 애플리케이션이다. 김 씨는 평생 모은 퇴직금과 예금 중 절반 이상을 고위험 기술주와 해외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했다. 그는 "은행 이자 몇 푼으로는 물가 상승을 감당할 수 없다"며 "원금 손실 걱정에 밤잠을 설치지만, 가만히 앉아서 자산이 쪼그라드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느냐"고 털어놓았다. 이는 김 씨 개인의 특별한 일탈이 아니다. 대한민국 은퇴 세대들이 직면한 보편적이고도 서글픈 자화상이다.
과거의 은퇴가 '휴식과 안정'을 의미했다면, 오늘날의 은퇴는 '생존을 위한 새로운 투자 전쟁의 시작'을 뜻한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100세 시대'가 현실화된 반면, 은퇴 자금의 수명은 턱없이 짧아졌기 때문이다. 노후 불안이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은 평생 보수적인 자산 관리를 해왔던 고령층을 변동성이 큰 위험 자산 시장으로 강하게 밀어내고 있다.
최소 생활비도 버거운 현실, 흔들리는 노후 전선
고령층이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 전선에 뛰어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소득 공백과 생활비 부족에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은퇴 후 가구의 최소 생활비는 월평균 248만 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은퇴 가구가 실제로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은 평균 230만 원에 불과했다. 매월 약 18만 원의 적자가 발생하는 셈이다. 이 수치는 기본적인 생계 유지만을 가정한 것으로, 의료비나 경조사비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이 추가되면 적자 폭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금의 소득 대체율이 낮은 상황에서 사적 연금 활성화마저 미진하다 보니, 은퇴자들은 스스로 부족한 생활비를 메워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결국 은퇴 자금의 '보존'보다 '증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이들을 고위험 투자판으로 이끄는 주된 요인으로 분석된다.
예적금 탈출 러시, 고위험 자산으로 향하는 '실버 머니'
자산 수명을 늘리기 위한 은퇴자들의 발걸음은 금융 시장의 지형마저 바꾸고 있다. 과거 고령층의 자산은 시중은행의 정기 예적금이나 국공채 등 안전 자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초저금리 기조의 장기화 여파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면서, 안전 자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자산의 실질 가치가 하락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이에 따라 증권가와 자산운용업계에서는 고령층 투자자의 비중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배당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고배당주나 리츠(REITs)는 물론이고, 원금 손실 가능성이 상존하는 파생결합증권(ELS)이나 해외 레버리지 상품에까지 노후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투자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고령층이 고위험 상품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가입했다가 시장 변동성 확대로 인해 일시에 노후 자금을 상실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자산 수명 늘릴 제도적 안전망과 맞춤형 포트폴리오 절실
은퇴 자금의 손실은 청년층의 투자 실패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령층의 경우 소득을 만회할 기회가 사실상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의 투자 실패가 곧바로 빈곤층 추락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퇴자들을 단순히 '개인 투자자'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자산 수명을 안정적으로 늘려줄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안전망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고령층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불완전 판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동시에, 은퇴 자금의 특성에 맞춘 안정적 수익 추구형 상품 개발을 유도해야 한다. 예컨대 연금형 부동산 상품이나 인플레이션 헤지가 가능한 장기 국채 투자 활성화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아울러 은퇴자 스스로도 단기적인 고수익 유혹에서 벗어나, 자산의 안정성과 유동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포트폴리오 다변화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이다. 노후의 투자는 '대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수성(守城)'의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