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뒤에 사람 기다리니까 제가 먼저 할게요." 서울 종로구의 한 패스트푸드 매장. 무인 단말기(키오스크) 앞에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 모 씨(76)는 뒤에 선 젊은이의 핀잔 섞인 목소리에 황급히 자리를 비켰다. 돋보기를 치켜쓰고 화면의 '주문하기' 버튼을 누른 지 3분이 지났지만, 복잡한 메뉴 선택과 모바일 쿠폰 바코드 인식 단계에서 길을 잃은 탓이다. 김 씨는 "은행도, 식당도, 병원도 이제는 기계나 스마트폰이 없으면 밥 한 끼 먹기 힘든 세상이 됐다"며 "세상이 빨라질수록 우리 같은 노인들은 사회에서 점점 지워지는 기분이 든다"고 쓸쓸히 털어놓았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의 모든 서비스를 누리는 '모바일 초연결 사회'가 도래했지만, 그 이면에는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일상에서 고립되는 노년층의 그늘이 짙어지고 있다. 무인화와 디지털화는 기업에게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의 극대화를 가져다주었지만, 고령층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일상적인 소비와 금융, 의료 서비스 이용 등 생존과 직결된 기본권마저 위협받는 실정이다.
장벽이 된 일상, 금융과 생활에서 지워지는 노년
가장 가파른 변화를 겪고 있는 분야는 금융이다. 시중은행들은 효율성을 이유로 오프라인 점포를 빠르게 통폐합하고 있다. 모바일 뱅킹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은 공과금을 내거나 송금을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멀리 떨어진 지점까지 찾아가야 하는 처지다. 금융당국과 업계는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고령층 특화 지점이나 공동 점포 등 대체 수단을 마련하고 있으며, 일련의 상생 금융 대책을 통해 고령층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특화 서비스를 전 지점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2026년 5월 1일 밝혔다. 그러나 현장의 고령층이 체감하는 금융 장벽은 여전히 높다. 대면 창구의 급격한 축소를 막을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고령층의 금융 소외를 막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소외는 비단 금융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병원 진료 예약부터 기차표 예매, 심지어 동네 주민센터의 민원 서류 발급까지 모바일 앱이나 무인 단말기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디지털 기기 조작에 서툰 노인들은 예약 경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며, 현장 대기 시간은 갈수록 길어지는 이중고를 겪는다. 기술의 편리함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차별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예산 깎인 디지털 교육, 갈 길 잃은 배움터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고령층을 위한 디지털 포용 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정책의 지속성과 실효성 면에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대표적인 정부의 디지털 포용 정책 사업인 '디지털 배움터' 예산은 2023년 698억 원에서 2024년 200억 원대로 급감했다. 예산이 반토막 이상 나면서 전국의 교육 거점이 줄어들고, 강사와 서포터즈 규모도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령층의 디지털 역량 강화를 위한 상설 교육 공간이 절실한 시점에서 오히려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은 정부의 정책 기조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단순히 예산의 규모를 넘어 교육의 질적 혁신도 필요하다. 현재 제공되는 대다수의 디지털 교육은 일회성 키오스크 체험이나 스마트폰 기본 조작법 전수에 그치고 있다. 고령층이 실생활에서 마주하는 복잡한 금융 앱 인증 절차나 기차표 예매, 병원 예약 등 실전형 교육은 턱없이 부족하다. 한 사회복지 전문가는 "노인들은 기기 조작법을 배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밀착형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속도'보다 '방향'... 대면 창구 유지와 포용적 설계 필요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둔 지금, 디지털 전환의 속도 조절과 함께 아날로그적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일은 국가적 과제다. 기술의 발전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도록 하는 '포용적 설계'가 도입되어야 한다. 무인 단말기의 화면 구성을 고령자 친화적으로 단순화하고 글씨 크기를 키우는 가이드라인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검토되어야 한다. 동시에 오프라인 대면 창구를 일정 비율 이상 유지하도록 강제하거나, 대면 서비스를 이용할 때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을 바라보는 사회적 관점이다.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지,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령층을 디지털 생태계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이들이 기술의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돕는 사회적 안전망을 촘촘히 짜야 할 때다. 속도전처럼 치닫는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 "단 한 사람도 뒤처지게 하지 않겠다"는 포용의 철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