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장이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을 넘어 대중화 단계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바로 화재 사고로 촉발된 이른바 '전기차 포비아(공포증)'다. 친환경성과 경제성을 무기로 급성장하던 전기차 산업은 이제 안전성이라는 근본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막연한 공포심을 가라앉히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데이터에 기반한 원인 분석과 실효성 있는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포비아의 실체와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

대중의 인식 속에서 전기차 화재는 주로 충전 중에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통계가 보여주는 양상은 다르다. 소방당국 및 관련 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전기차 화재의 73.4%가 도로 및 터널 등 실제 운행 중에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화재의 주된 원인이 단순히 충전기 자체의 결함이나 과충전뿐만 아니라, 주행 중 배터리에 가해지는 물리적 충격, 열폭주 현상, 혹은 배터리 셀 자체의 제조 결함 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함을 시사한다.

결국 주행 중 발생하는 화재를 예방하고 사후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배터리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의 고도화와 함께, 배터리 자체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투명한 정보 공개 체계가 필수적이다. 사고의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배터리 정보의 투명성은 타협할 수 없는 전제 조건이 되고 있다.

'배터리 실명제'와 정보 공개의 제도화

그동안 전기차 소비자들은 자신이 구매한 차량에 어떤 제조사의 어떤 화학 조성 비율을 가진 배터리가 탑재되었는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다. 완성차 제조사들이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구체적인 배터리 정보를 비공개로 부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안전성 논란은 이러한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시장 전문가들은 소비자의 알 권리와 안전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배터리 정보 공개 의무화(이른바 배터리 실명제)' 도입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배터리 제조사, 생산일자, 주요 원료 구성 등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제도는 글로벌 트렌드이기도 하다. 유럽연합(EU)이 도입을 추진 중인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 제도가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도 정부와 국회를 중심으로 배터리 식별번호를 차량 등록 시 함께 기재하도록 하거나, 주요 배터리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법안 개정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정보가 투명해질 때 비로소 시장의 막연한 불안감이 합리적인 관리와 선택으로 전환될 수 있다.

충전 인프라 안전 기준의 고도화

배터리 자체의 투명성 확보와 더불어, 전기차의 주요 생활 공간인 충전 시설의 안전 기준 강화 역시 핵심 과제다. 특히 지하 주차장에 설치된 충전 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대형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에 정부는 제도적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5년 11월 26일 '전기안전관리법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을 공포하여 전기차 충전사업자가 충전시설의 위치, 설치 형태 및 안전 관리 상태 등을 체계적으로 등록하고 관리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러한 법적 보완은 충전 시설의 무분별한 설치를 막고, 화재 발생 시 신속한 소방 대응이 가능하도록 물리적 위치 정보를 데이터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나아가 향후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전 장치(과충전 방지 기능, 열화상 카메라 연동 등)를 갖춘 충전기에 한해 설치 보조금을 차등 지원하는 등 시장 유인책과 규제를 병행하는 정교한 정책 설계가 요구된다.

전기차 포비아는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아닌, 신기술 도입 과정에서 겪는 과도기적 진통이다. 이를 극복하는 지름길은 규제 일변도의 억제가 아니라, '안전의 제도화'를 통한 신뢰 구축이다. 배터리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충전 인프라의 예방적 안전 기준 강화는 전기차 산업이 한 단계 더 성숙한 궤도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다리다. 정부와 업계의 선제적이고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