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의 한 골목길에서 15년째 인쇄소를 운영해 온 김 모(54) 씨의 작업실은 정막감만 감돌았다. 한때 밤샘 작업으로 활기가 넘치던 이곳은 이제 멈춰 선 기계들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 씨는 "코로나19 시기를 버텨내며 진 빚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매달 빠져나가는 이자 비용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며 "금리가 내릴 것이라는 희망 고문 속에 버텼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토로했다. 김 씨의 한탄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오늘날 고금리 장기화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대한민국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냉혹한 현실을 대변한다.
최근 글로벌 통화 긴축 기조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시장을 지배하던 금리 인하 기대감은 사실상 소멸했다. 오히려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열어두어야 한다는 경고음이 도처에서 울린다. 이에 따라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이 직면한 '금융 절벽'은 한층 가파라졌다. 시중은행의 대출 문턱은 높아졌고, 제2금융권마저 연체율 관리를 위해 대출 고삐를 죄면서 취약 차주들의 자금줄이 급격히 마르고 있다.
벼랑 끝에 선 자영업자, 2배 급증한 금융채무불이행자
이러한 한계 상황은 구체적인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관련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3개월 이상 원리금을 연체해 금융채무불이행자로 등록된 개인사업자 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신용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2년 6만 7,900명 수준이던 금융채무불이행 개인사업자는 고금리 기조가 심화된 2025년 말 기준 12만 1,100명으로 집계되며 불과 수년 사이에 약 2배 가까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연체율 상승을 넘어, 자영업 생태계의 기초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음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자영업자들의 채무 불이행이 급증한 원인으로 '다중채무의 늪'을 꼽는다. 매출 회복이 더딘 상황에서 기존 대출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대출을 받는 악순환이 지속되었고, 금리 상승으로 이자 부담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결국 파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자영업은 가계부채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들의 몰락은 곧 가계 경제의 붕괴와 소비 위축이라는 내수 침체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깊다.
중소기업으로 번지는 '돈맥경화'와 한계기업의 경고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영업자의 위기는 고스란히 중소기업과 한계기업으로 전이되고 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 비용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이른바 '한계기업(좀비기업)'의 비중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대기업에 비해 신용도가 낮고 담보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고금리 상황에서 자금 조달 경로가 사실상 차단된 상태다. 회사채 발행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은행권 대출 연장마저 거부당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정부의 코로나19 관련 금융지원 조치가 종료되면서 그동안 수면 아래 숨겨져 있던 부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다"며 "특히 제조업 기반의 중소기업들이 무너질 경우 고용 시장에 미치는 충격은 자영업자 위기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치명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고환율, 고금리의 '3고(高)' 현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체력이 약한 기업부터 차례로 쓰러지는 '도미노 부도'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단순 연명 아닌 구조조정과 '핀셋 지원' 병행해야
고금리 장기화라는 거시경제적 환경을 개별 기업이나 자영업자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정부와 금융당국의 선제적이고 입체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와 같은 일률적인 만기 연장이나 상환 유예 등 '임시방편식 연명 치료'는 부실의 규모만 키우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과 자영업자에게는 맞춤형 금융 지원과 경영 컨설팅을 제공하는 '핀셋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한계에 다다른 기업에 대해서는 신속하고 질서 있는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투트랙(Two-Track) 전략이 요구된다.
결국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는 '연착륙'에 있다. 금리 인하라는 외부적 요인에만 기대를 걸기에는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 금융권 역시 단기적인 건전성 관리에만 치중해 자금줄을 전면 차단하기보다는, 유망한 기업들이 일시적 자금난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상생 금융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고금리의 긴 터널 속에서 우리 경제의 허리인 중소기업과 자영업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고 실효성 있는 안전망을 구축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