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026년 6월 3일 제9회 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과 후보들의 공약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으나, 정작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는 ‘매니페스토(Manifesto) 운동’은 심각한 무력화 위기에 직면했다. 구체적인 예산 확보 방안과 이행 계획을 담아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취지는 사라지고, 천문학적인 재원이 소요되는 개발 공약만 난무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지난 2026년 5월 17일, 정치권의 무책임한 재정 지출 약속을 제한하기 위해 ‘공약재정 샐러리 캡(Salary Cap)’ 도입을 제안한 것은 현재의 공약 검증 시스템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장밋빛 공약과 지방 재정의 심각한 불일치

이번 지방선거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역적 특성이나 재정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첨단 산업 유치’ 공약의 남발이다. 주요 정당과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인공지능(AI) 연구단지 유치 등 수조 원대 예산이 필요한 대형 사업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약들 중 재원 조달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가 평균 40%대에 머물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공약들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는 첫 삽조차 뜨기 어려운 ‘희망고문’에 가깝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재정 전문가들은 현재의 공약 남발 현상을 ‘재정 불일치(Fiscal Mismatch)’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는다. 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세입 규모와 후보들이 약속한 세출 규모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국세 수입 감소에 따른 지방교부세 감액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현실성 없는 대규모 인프라 공약은 지방 재정의 파탄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의 ‘아니면 말고’식 공약이 선거판을 지배하고 있다.

검증 시스템의 무력화와 정치적 양극화

과거 선거에서 후보자의 자질과 정책을 검증하는 유용한 도구로 작동했던 매니페스토 운동이 이처럼 힘을 잃게 된 원인은 복합적이다. 가장 큰 원인은 공약 검증 결과가 실제 표심으로 연결되지 않는 정치적 양극화 구도에 있다. 정책의 구체성이나 실현 가능성보다는 진영 논리와 거대 담론 위주의 선거전이 전개되면서, 세부 공약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 자체가 크게 떨어졌다. 후보자들 역시 굳이 까다로운 재정 검증을 거쳐 신뢰성을 입증하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슬로건을 앞세우는 것이 선거 공학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또한, 매니페스토 검증 기관의 권고나 평가 결과에 강제성이 없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공약 이행 계획서를 불성실하게 제출하거나 아예 제출하지 않더라도 후보자가 입는 타격은 거의 없다. 정책 선거를 유도할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매니페스토 운동은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형식적인 통과의례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공약재정 샐러리 캡' 도입과 제도적 대안

결국 무너진 정책 선거의 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제력 있는 제도적 장치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제안한 ‘공약재정 샐러리 캡’은 지방자치단체의 직전 연도 예산 규모나 재정자립도 등을 고려하여, 후보자가 제시할 수 있는 공약의 총예산 한도액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제도다. 스포츠의 샐러리 캡처럼 무분별한 몸집 불리기를 막아 최소한의 재정 건전성을 담보하겠다는 취지다.

나아가 선거관리위원회 주관의 공약 비용추계 제도(Costing)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제안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후보자가 공약을 발표할 때 독립적인 국가기관이나 전문 공인기관으로부터 재원 조달 계획의 적정성 검증을 받도록 강제하는 방식이다. 미국이나 유럽 일부 국가에서 시행 중인 이 제도는 유권자들에게 ‘공짜 점심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후보자들에게는 책임감 있는 공약 작성을 유도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매니페스토 운동의 무력화는 단순한 정책 검증의 실패를 넘어 민주주의 대의제 시스템의 위기를 의미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표를 얻고, 당선 이후에는 재정 부족을 핑계로 공약을 파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면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불신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공약의 '양적 팽창'에서 '질적 책임성'으로 선거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