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공장 내부, 거대한 기계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전기차에서 탈거된 배터리 팩을 잘게 부순다. 알루미늄과 구리 선이 분리되고 나면, 마침내 검은색 가루가 쏟아져 내린다.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등 배터리의 핵심 원료들이 뒤섞인 이른바 '블랙매스(Black Mass)'다. 과거에는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골칫거리 폐기물에 불과했던 전기차 폐배터리가 이제는 전 세계가 탐내는 '도시 광산'의 핵심 노다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맞아 수명을 다한 폐배터리를 어떻게 재활용하느냐가 국가 산업의 명운을 가를 새로운 전장으로 부상했다.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과 맞물려 폐배터리 배출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관련 시장조사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 규모는 2023년 108억 달러 수준에서 연평균 17%씩 가파르게 성장해 2030년에는 535억 달러, 오는 2040년에는 2,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된다. 바야흐로 '폐배터리 골드러시'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단순한 폐기물 처리를 넘어, 배터리 제조부터 재활용까지 이어지는 완벽한 '폐쇄 루프(Closed Loop)' 순환경제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자원 안보의 새로운 돌파구, '도시 광산'을 선점하라
폐배터리 재활용이 주목받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자원 안보'에 있다. 한국은 배터리 강국으로 꼽히지만, 정작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핵심 광물의 수입 의존도는 90%를 상회한다. 특정 국가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상황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나 자원 무기화 조치가 발생할 경우 국내 배터리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폐배터리 재활용은 해외 광산 개발 없이도 핵심 원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이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과 환경 규제를 강화하면서 폐배터리 재활용의 중요성은 한층 더 커졌다. EU의 새로운 규정은 향후 배터리 제조 시 일정 비율 이상의 재활용 원료 사용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역시 재활용 광물에 대한 세제 혜택을 연계하고 있다. 결국 폐배터리에서 고순도의 광물을 뽑아내는 기술력을 갖추지 못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구조다.
친환경 습식 제련 기술, 탄소 규제 장벽 넘을 열쇠
과거의 배터리 재활용이 주로 고온으로 녹여 금속을 추출하는 건식 제련에 의존했다면, 최근에는 화학 용액을 활용해 광물을 분리해내는 '친환경 습식 제련' 기술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건식 제련은 대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회수율이 낮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 습식 제련은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리튬 등 핵심 광물의 회수율을 95%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친환경 기술로 뽑아낸 광물이어야만 글로벌 규제 장벽을 넘을 수 있다는 점도 기술 고도화를 재촉하는 요인이다.
국내 주요 기업들 역시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독자적인 친환경 추출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배터리 셀 제조사부터 소재 기업, 그리고 폐기물 처리 전문 기업들까지 합작법인을 설립하거나 지분 투자를 단행하며 밸류체인을 수직계열화하는 추세다. 배터리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 물질을 최소화하고, 공정 과정의 물과 에너지를 재사용하는 친환경 공정 기술이 곧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
제도적 걸림돌 제거와 생태계 조성이 과제
하지만 진정한 순환경제 생태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술력 확보만큼이나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국내 폐배터리 관련 법적 지위와 수거, 운송, 보관에 관한 규정은 여전히 전통적인 폐기물 관리틀에 갇혀 있어 체계적인 산업 육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폐배터리를 단순한 '폐기물'이 아닌 '순환자원'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안전하고 신속한 유통이 가능하도록 물류 인프라와 표준화된 성능 평가 체계를 조속히 구축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폐배터리의 발생부터 재제조, 재활용에 이르는 전 주기의 이력을 추적하는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 제도의 조기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투명한 이력 관리를 통해 배터리의 안전성을 담보하고 재활용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폐배터리는 더 이상 버려지는 쓰레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를 담보할 전략 자산이다. 규제 완화와 기술 투자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국가적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