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민을 위한 에볼라(Ebola) 바이러스 격리 시설을 케냐에 설치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자, 해당 지역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케냐에는 현재 에볼라 발병 사례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바이러스 위험을 케냐에 전가하려 한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미국이 자국 내 감염자 수용을 꺼리면서 제3국에 격리 시설 설치를 추진하는 것은 '이중 잣대'라는 지적이다.
나이로비 인근 지역 주민들, 바이러스 확산 우려
미국 정부는 케냐 중부 나이로비에서 약 190km 떨어진 나뉴키(Nanyuki) 지역에 있는 라이키피아 공군기지(Laikipia Air Base)에 50개 병상 규모의 격리 시설을 설치하고, 30명의 의료 인력을 파견할 계획이다. 이 시설은 에볼라에 노출된 미국 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나뉴키 주민들은 바이러스 유입 및 확산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택시 운전사 찰스 마텡게(Charles Mathenge)는 "모든 사람은 자국에서 격리되어야 한다. 외국인이 질병을 들여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며 "케냐는 우리의 나라이며, 우리는 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념품 판매상 데이비드 물린지(David Mulinge) 역시 "미국인들이 감염된 자국민을 본국으로 들이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케냐로 보내려 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라며 "이는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케냐 법원, 시설 설치 잠정 중단 명령… 주권 침해 논란도
이번 계획은 케냐 내에서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케냐 의사·약사·치과 의사 협회(Kenya Medical Practitioners, Pharmacists and Dentists Union)의 다브지 아텔라(Dr Davji Atellah) 박사는 "케냐가 격리 식민지로 취급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에게 너무 위험하다면 케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시민단체 '카티바 연구소(Katiba Institute)'가 제기한 소송에 따라 나이로비 고등법원은 지난주 해당 시설 설치 및 에볼라 노출자 입국을 잠정적으로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단체는 양국 정부 간의 시설 설치 협정이 공중 보건, 거버넌스, 주권에 심각한 우려를 제기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7일 이내에 관련 모든 협정 내용을 공개할 것을 정부에 명령했으며, 다음 심리는 6월 23일로 예정되어 있다. 한편, 제러미 루인(Jeremy Lewin) 미국 해외원조·인도주의·종교자유 담당 차관보는 케냐 당국과 긴밀히 협력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고 전했다. 윌리엄 루토(William Ruto) 케냐 대통령은 해당 계획이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있으며, 국가 보건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부라고 옹호했지만, 법원의 결정으로 제동이 걸린 상태다.
국제적 상황 및 향후 전망
현재 인근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DRC)에서는 부츈디부고 바이러스(Bundibugyo virus)로 인한 에볼라가 확산되어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한 상태다. WHO에 따르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60명 이상이 사망하고 344명의 확진자가 발생했으며, 우간다에서도 1명이 사망하고 9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케냐에서는 아직 공식적인 감염 사례가 보고되지 않았다. 과거 에볼라 발생 시 미국은 감염된 자국민을 본국으로 이송해 치료해왔다.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미국 국무장관은 5월 28일, 잠재적 에볼라 환자의 미국 입국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케냐 격리 시설 설치 계획은 이러한 미국의 태도 변화와 맞물려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향후 케냐 법원의 최종 판결과 양국 정부의 협상 결과에 따라 사태의 향방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