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무대에서 '줄타기'라는 말은 오랫동안 기회주의라는 오명과 동의어로 쓰였다. 확실한 아군과 적군을 갈라 세우는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모호한 태도는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미·중 패권 경쟁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격화되는 지금, 여전히 그 낡은 공식이 유효할까? 오히려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단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받는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가로막는 가장 위험한 외교적 자해 행위일지 모른다.

오늘날의 국제 정세는 이념의 선명성만으로 돌파할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이고 복잡해졌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과거의 단순한 공식은 유통기한이 끝난 지 오래다. 첨단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핵심 기술이 곧 국가 안보이자 경제적 생존 무기가 된 시대에, 어느 한쪽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극단적 선택은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결국 동맹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고도의 실용주의 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러한 외교적 고민과 방향성은 객관적인 외부의 시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부가 지난 2026년 6월 11일 발표한 외신 보도 분석 자료에 따르면, 워싱턴포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 등 세계 주요 외신들 역시 미·중 갈등 국면에서 한국이 처한 독특한 위치와 외교적 포지셔닝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외신들은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을 담당하면서도 이념적 편향에 갇히지 않고 실용적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 향후 동아시아 정세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국제사회가 한국에 기대하는 역할이 단순한 세력 대결의 동참자가 아닌, 전략적 유연성을 갖춘 영민한 행위자임을 보여준다.

실용주의 외교가 일시적인 임기응변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전략적 유연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유연성은 원칙 없는 타협이나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외교의 기본 축으로 삼되,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경제적·지정학적 협력 통로를 상시 열어두는 정교한 이중 트랙 전략이다. 특정 진영에 맹목적으로 갇히기보다, 개별 사안과 국익의 크기에 따라 연대의 대상을 유연하게 바꾸는 실무적 접근이 필요하다.

외교는 도덕적 선악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냉혹한 각축장이다. 미·중 갈등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 실용주의 외교의 진정한 시험대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영민하게 움직일 때, 다가오는 위기는 오히려 한국 외교의 공간을 넓히고 국익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기회의 창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