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기준, 국내 등록 차량 10만 대당 화재 건수는 전기차가 11.35건이었다. 내연기관차는 14.47건. 숫자만 보면 전기차가 더 안전하다. 그런데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마다 '전기차 충전 금지' 안내문이 붙고, 일부 입주민 커뮤니티에서는 전기차 주차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치와 체감 사이의 간극이 이토록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왜 '더 안전한' 차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가
전기차 화재의 문제는 빈도가 아니라 양상에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한번 열폭주(thermal runaway)가 시작되면 물로 끄기 어렵고, 완전히 진화하는 데 수 시간이 걸린다. 지하 밀폐 공간에서 발생하면 연기와 유독가스가 빠르게 퍼진다.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 화재처럼, 차 한 대의 불이 수십 대를 태우는 장면은 사람들의 기억에 강하게 각인된다. 내연기관차 화재가 더 자주 일어나도, 전기차 화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위험의 '크기'보다 위험의 '통제 불가능성'이 공포를 키운다.
여기에 정보 비대칭이 불안을 증폭시킨다. 소비자는 자신이 구매한 전기차에 어떤 제조사의 배터리 셀이 탑재됐는지 알 수 없다. 완성차 업체가 공개를 꺼리는 구조였다. 배터리 제조사마다 셀 안전성, 배터리관리시스템(BMS) 품질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 입장에서 전기차는 그냥 '전기차'일 뿐이었다.
배터리 실명제, 정보 공개의 최소 요건
정부가 추진하는 배터리 실명제는 이 정보 공백을 겨냥한다. 차량 출고 시 탑재된 배터리 제조사, 셀 모델, 용량 등 핵심 정보를 소비자에게 의무적으로 고지하는 방식이다. 소비자가 구매 단계에서 배터리 사양을 비교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제조사 모두 품질 경쟁에 노출된다. 정보 공개가 시장 규율로 작동하는 구조다.
다만 실명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배터리 제조사 이름을 알아도, 그 배터리가 얼마나 안전한지 판단할 기준이 소비자에게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실명제와 함께 배터리 안전 등급 공시 제도를 병행해야 실질적 효과가 있다고 본다. 미국의 경우 연방자동차안전기준(FMVSS)을 통해 배터리 충격·과충전·열 노출 시험을 규정하고 있고, 유럽연합은 2024년부터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 제도를 단계적으로 시행하며 배터리 이력 데이터를 디지털로 추적하는 체계를 구축 중이다. 한국의 현행 기준은 이 흐름보다 한 박자 늦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전 기준 강화, 비용인가 투자인가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제조사 일부는 규제 강화에 따른 비용 부담을 우려한다. 배터리 셀 단위의 안전 인증, BMS 소프트웨어 검증, 화재 감지·차단 시스템 의무 탑재 등이 추가되면 차량 원가가 올라간다. 시장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반대편의 계산도 있다. 전기차 화재 한 건이 아파트 단지를 태우고, 수십 대의 차량 손해배상으로 이어지며, 전기차 시장 전체의 신뢰를 흔든다. 2024년 화재 사고 이후 국내 전기차 신규 등록 증가세가 눈에 띄게 꺾인 것은 시장이 이미 그 비용을 치르고 있다는 신호다. 안전 기준 강화는 규제 비용이 아니라, 시장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전기차 포비아의 본질은 차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손쓸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배터리 실명제와 안전 기준 강화는 그 불안에 데이터와 제도로 답하는 작업이다. 속도가 관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