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1억 5천만 원. 청년이 5년 동안 모은 돈이었다. 계약 만료일 아침, 집주인의 전화는 끊겨 있었다. 등기부를 다시 펼쳐보니 이미 수십 건의 근저당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 집은 처음부터 덫이었다.

국토교통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2023년 6월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2026년 5월 말까지 피해자로 공식 인정된 사람은 39,121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76%가 40세 미만 청년층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이 사기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다. 구조가 만들어낸 참사다.

특별법 시행은 분명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다. 경매 유예, 우선매수권 부여, 긴급 복지 연계 — 법이 나열한 지원 항목은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장은 다르다.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려 해도 잔금을 치를 자금이 없고, 경매 유예가 끝나면 결국 거리로 내몰린다. 법이 권리를 주었지만, 그 권리를 실행할 수단을 함께 주지 않았다. 빈 그릇에 담긴 메뉴판이다.

일부에서는 공공 개입의 확대가 도덕적 해이를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타당한 지적이다. 무분별한 구제가 시장 신뢰를 교란할 위험은 실재한다. 그러나 이 논리를 지금의 피해자들에게 그대로 들이대는 것은 가혹하다.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 시장 윤리를 설교하는 것은, 익사자에게 수영을 가르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피해자의 도덕성이 아니라, 애초에 이 사기가 가능했던 제도의 허점이다.

해법은 이미 어느 정도 보인다. 공공임대주택 우선 배정을 실질적으로 확대하고, LH나 지방공사가 피해 주택을 직접 매입해 피해자에게 저렴하게 재임대하는 방식은 여러 차례 논의됐다.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을 임대인에게 의무화하고, 등기부 열람을 임차인이 계약 전 단계에서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도록 전산화하는 것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주거 연속성의 보장이다. 피해자가 법적 절차를 밟는 동안 쫓겨나지 않도록, 임시 공공임대를 신속히 연결하는 '주거 안전망 패스트트랙'을 제도화해야 한다. 긴 심사와 서류 더미를 통과하고 나면 이미 길 위에 나앉은 뒤인 경우가 너무 많다. 속도가 곧 복지다.

집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잠을 자는 곳이자, 내일을 준비하는 자리다.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는 「법은 선하고 공정한 것의 기술」이라 했다. 공정함이 서류 안에만 머물고 삶 속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장식이다.

집을 잃은 사람에게 집부터 돌려주는 것 — 그것이 구제의 시작이자,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다. 나머지 논쟁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