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의 한 리조트 라운지. 노트북을 펼친 30대 마케터 A씨는 오전 화상회의를 마치고 오후엔 올레길을 걷는다. 서울 사무실에서 처리하던 업무가 고스란히 따라왔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한라산이 달랐다. 「여기서 일하니까 번아웃이 덜한 건지, 아니면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의 말에 워케이션의 본질적 딜레마가 담겼다.
워케이션(Workcation)은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합친 개념이다.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자리를 잡으면서, 기업들이 한 발 더 나아가 비일상적 공간에서의 근무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직원 복지와 인재 유치를 동시에 노린 카드다. 중견기업 HLB는 2025년 4분기부터 기존 스마트 워크 제도를 워케이션으로 확대해 시범 운영할 계획을 공식화했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까지 전선이 넓어지는 모양새다.
지자체와 기업이 손잡다
워케이션 확산의 가장 적극적인 플레이어는 지방자치단체다. 제주도는 워케이션 전용 거점 공간을 운영하며 기업과 직접 협약을 맺어왔다. 2025년 말 기준 제주도와 워케이션 협약을 체결한 기업·기관 수는 꾸준히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도내 숙박·외식업 매출 증대로 이어진다는 분석이 나온다. 강원도, 전남 여수, 경남 통영 등 지자체들도 저렴한 거점 사무공간과 숙박 할인 패키지를 앞세워 수도권 직장인 유치에 나섰다.
기업 입장에서 워케이션의 메리트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국내 한 IT기업이 내부 시범 운영 후 자체 설문을 진행한 결과, 참여 직원의 70% 이상이 「창의적 사고와 업무 집중도가 높아졌다」고 응답했다. 단조로운 사무실 환경에서 벗어나 환경 자체가 뇌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MZ세대 구직자 사이에서 복지 항목으로 워케이션을 명시한 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채용 업계의 분석도 나온다. 인재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워케이션은 단순 복지를 넘어 채용 경쟁력이 된다.
제도 없는 워케이션은 '노동 없는 휴가'도 '휴가 없는 노동'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장밋빛 효과 이면에는 구조적 공백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근로시간 관리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사업장 외 근무에 대한 시간 산정 기준이 모호하다. 워케이션 중 업무와 휴식의 경계가 흐려질 경우, 초과근무 수당 미지급이나 반대로 실질 근무 시간 감소를 둘러싼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고용노동부가 유연근무제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있지만, 워케이션 특화 지침은 아직 정비 단계다.
팀 단위 업무 공백도 현실적 장벽이다. 개인이 워케이션을 떠난 사이 남은 팀원에게 업무가 집중되는 현상은 여러 기업에서 보고된다. 「나 혼자 좋은 일 하는 것 같아서 눈치가 보인다」는 직원들의 토로가 이를 방증한다. 결국 워케이션이 조직 문화 전반의 변화 없이 일부 직원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으로 굳어질 경우, 내부 불만의 씨앗이 된다.
해외 사례는 반면교사이자 참고서다. 일본은 기업과 지방정부가 연계한 「지역 워케이션」 프로그램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면서, 참여 기업에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 지방 소멸 대응 정책과 연결한 것이다. 한국도 지방소멸 문제가 심각한 만큼 워케이션을 인구 분산 정책과 연동하려는 논의가 정부 안팎에서 이어지고 있다.
워케이션이 진짜 효과를 내려면 세 가지가 맞물려야 한다. 명확한 성과 기반 평가 시스템, 팀 전체가 함께 활용할 수 있는 로테이션 설계, 그리고 근로시간 특례 규정의 정비다. HLB의 시범 운영이 업계의 시선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도 기업의 제도 설계 방식이 향후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떠난 노동이 자유인지 족쇄인지는, 결국 그 제도를 설계한 사람의 의도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