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의 한 IT 기업 회의실. 평소라면 엄숙한 주간 회의가 열렸을 공간이 거대한 응원석으로 변했다. 대형 스크린 앞에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든 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환호성을 지른다. 지난 이탈리아전에서 극적인 2대 1 승리를 거둔 대표팀의 활약에 아침부터 직장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퇴근 후 치맥(치킨과 맥주)을 즐기며 밤새워 응원하던 과거의 월드컵 풍경이 사라지고, 평일 오전 브런치를 먹으며 태극전사들을 응원하는 이른바 '브런치 응원'이 새로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은 한국과의 시차로 인해 주요 경기가 한국 시간으로 오전 시간대에 치러진다. 특히 이탈리아전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가오는 남은 조별리그 일정은 모두 평일 오전 10시다. 오는 6월 19일 수요일 오전 10시에는 멕시코전이, 이어 6월 25일 화요일 오전 10시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전이 예정되어 있다. 직장인과 학생 모두가 가장 분주하게 움직일 시간대에 경기가 열리면서, 일상과 응원을 병행하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치맥' 가고 '샌드위치' 왔다, 유통·외식업계의 빠른 태세 전환
이러한 시간대의 변화는 소비 지형도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 기존 월드컵의 최대 수혜주였던 치킨 전문점과 주류 업계 대신, 브런치 카페와 편의점, 베이커리 업계가 분주해졌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 오전 시간대의 샌드위치, 샐러드, 간편식 매출은 평소 대비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배달 플랫폼들은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아침 배달 특별 쿠폰'을 발행하며 직장인들의 아침 식사 겸 응원 메뉴 수요를 공략하고 있다. 한 프랜차이즈 카페 관계자는 "경기가 있는 날 아침에는 단체 주문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다"며 "치맥 대신 커피와 베이글을 들고 모니터 앞에 모이는 이들이 새로운 주류 소비층으로 부상했다"고 전했다.
'모닝 스포츠 워케이션'…유연근무제와 만난 직장·대학가 풍경
기업들의 대응도 흥미롭다. 과거에는 평일 오전에 대형 스포츠 경기가 열리면 업무 몰입도 저하를 우려해 단속에 나서기 일쑤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사기 진작과 사내 소통의 기회로 삼는 분위기다.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많은 기업들은 경기 당일 오전 근무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아예 사내 라운지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브런치를 제공하는 '뷰잉 파티(Viewing Party)'를 개최하고 있다. 대학가 역시 활기차다. 기말고사 기간과 맞물린 대학가에서는 도서관 대신 학생회관에 모여 학교 측이 제공하는 아침 김밥과 컵과일을 먹으며 단체 응원을 펼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대학생 최모(24) 씨는 "오전 10시 경기는 수업 시간과 겹치기도 하지만, 교수님과 학생들이 강의실 스크린으로 함께 경기를 보며 수업을 대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시차 장벽 넘은 새로운 응원 문화, '일상 속 축제'로의 진화
전문가들은 이번 '브런치 응원' 현상이 단순히 시차로 인한 일시적 유행을 넘어, 한국 사회의 변화된 라이프스타일을 투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주 52시간 근무제 안착과 유연근무제의 확산, 그리고 워라밸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문화가 결합해 '오전 시간대 스포츠 관람'이라는 낯선 환경을 유연하게 수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과거의 월드컵 응원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일탈을 즐기는 축제였다면, 지금의 브런치 응원은 일상 업무의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도 공동체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건전한 '일상 속 축제'로 진화했다는 평가다. 다가오는 멕시코전과 남아공전은 이러한 새로운 응원 패러다임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았는지 확인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