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분기,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낸 관세는 33억 달러(약 4조 6,000억 원)였다. 트럼프 2기 출범 직전인 2024년 4분기와 비교하면 47배 급증한 수치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 결과 한국은 이 기간 관세 증가율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반기 만에 기업 수익성을 직격한 이 충격이, 한국 통상 전략의 근본적 재편을 밀어붙이는 배경이다.

미·중 의존의 균열, 아세안이 벌어진 틈을 채운다

한국무역협회 통계를 보면 2025년 1~5월 대미·대중 수출 비중은 36.74%로 전년 동기(38.20%) 대비 1.46%p 줄었다. 작은 수치처럼 보이지만 추세가 분명하다. 산업통상자원부의 5개년(2021~2025년) 분석에서 대중 수출은 19.7% 감소했고, 대중남미 수출은 같은 기간 258억 달러에서 310억 달러로 늘었다. 대미 수출은 28.2% 증가했으나, 지금의 관세 장벽이 그 성장세를 얼마나 잠식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 빈자리를 아세안이 메우고 있다. 베트남으로의 수출 비중은 0.55%p, 말레이시아는 0.24%p 각각 올랐다. 그런데도 아세안 5대국(베트남·싱가포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의 전체 수입에서 한국산 비중은 2018~2023년 평균 8.2%에 불과했다. 이 시장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다른 나라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잠재적 확장 여지가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공장과 자원, 두 축의 현지화 전략

수출선 다변화는 말뿐이 아니라 철강과 배터리, 광물로 구체화되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은 총 11억 달러를 공동 투자해 인도네시아 카라왕에 배터리 셀 합작공장을 건설했다. 2025년 양산을 목표로 한 이 공장은 동남아 현지 최초의 한국계 배터리 생산 거점이다. 미국 시장을 겨냥한 수출품에 '인도네시아산 부품'을 장착함으로써 관세 부담을 우회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중남미에서는 자원 확보와 시장 개척이 동시에 진행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5년 9월 에콰도르와 전략적경제협력협정(SECA)에 정식 서명했다. 최대 40%에 달하던 자동차 관세가 단계적으로 철폐되고, 중남미 자원 공급망 협력의 제도적 틀이 만들어졌다. 멕시코에서는 한·멕시코 수교 60주년을 맞아 산업부와 KOTRA가 4월 멕시코시티에서 '파트너십 플러스 위크'를 열고 미국 고율 관세를 피하기 위한 니어쇼어링 전략을 논의했다. 멕시코를 미국 공급망의 우회 거점으로 쓰겠다는 구상이다.

자원 조달 측면에서는 한국수출입은행이 캐나다수출개발공사(EDC)와 손잡고 칠레·페루 구리광산, 호주 희토류 등 총 10건의 대형 자원 프로젝트에 공동 금융을 지원하며 원자재 공급망의 다층화를 꾀하고 있다.

민관 합동 없이는 '각개격파'로 끝난다

기업 단독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5년 8월 KOTRA,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삼성전자, 현대차,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기관·기업을 한자리에 모아 글로벌 공급망 규제 대응 민관 합동 체계를 가동했다. 각 기업이 개별적으로 미국의 공급망 실사 요건이나 원산지 규정에 대응하는 데는 비용과 정보력에서 한계가 따른다. 정부가 협상 채널을 열고 기업이 그 안에서 구체적 거점을 확보하는 구조가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다만 과제도 선명하다. 아세안 8.2%라는 시장 점유율은 확장 가능성인 동시에 그간의 저조함이기도 하다. 동남아 현지 생산 거점은 미국의 원산지 규정 강화 시 언제든 다시 장벽에 부딪힐 수 있다. 미국이 '우회 수출'에 제재를 가한 전례는 이미 여러 산업에서 확인됐다. 한국이 지금 깔고 있는 우회로가 진짜 교역 다변화로 굳어지려면, 아세안·중남미 현지 수요를 독립적으로 키우는 데 얼마나 빠르게 투자하느냐가 관건이다. 관세를 피하기 위한 공급망과, 새 시장을 위한 공급망은 목적지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