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함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당선인은 이미 결정됐다. 오는 6월 3일 실시되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없이 배지를 달게 된 '무투표 당선인'이 무려 500명을 넘어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5월 16일 발표한 후보 등록 결과에 따르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경쟁자 없는 무투표 선거구는 총 307곳, 등록 후보자는 513명에 달한다. 이 중 공동 등록에 따른 동반 당선 등을 제외하고 실제로 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되는 후보는 총 504명으로 집계됐다. 유권자의 선택권이 원천 차단된 채 지방의회와 기초자치단체가 구성되는 기형적 상황이 현실화된 것이다.

20년 만에 10배 급증한 무투표 당선, 제도 도입의 역설

이러한 무투표 당선자 폭증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고착화된 구조적 병폐다.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가 처음 도입된 2006년 제4회 지방선거 당시 무투표 당선자는 48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8회(2022년) 지방선거에서 490명으로 급증하더니, 이번 제9회 선거에서는 504명을 기록하며 2회 연속 500명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약 20년 만에 무투표 당선자 규모가 10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정당공천제 도입 당시 학계와 정치권은 정당의 책임 정치를 강화하고 우수한 인재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거대 양당이 지역별 패권을 양분하는 구도 속에서, 특정 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공식이 확립되자 경쟁 후보의 씨가 마르는 부작용을 낳았다. 정치 신인의 진입 장벽은 높아졌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고사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영호남 일당 독점의 고착화와 '투표권 박탈'

무투표 당선의 이면에는 특정 정당의 지역 일당 독점 구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 후보 등록 결과에서 가장 두드러진 곳은 호남 지역이다. 광주·전남 지역의 무투표 당선인은 총 80명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무려 98.75%에 해당하는 79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사실상 공천 단계에서 모든 승부가 결정 난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영남 지역에서도 정당만 바뀐 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된다. 특정 정당의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주의 구도가 심화되면서, 상대 정당은 후보조차 내지 못하는 '선거 포기'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해당 지역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있든 없든,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고 투표할 권리 자체를 박탈당하게 된다.

견제 없는 지방자치, 풀뿌리 민주주의의 위기

무투표 당선의 가장 큰 폐해는 선거 과정에서 필수적인 '검증'과 '평가'가 생략된다는 점이다. 무투표 당선 예정자들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 선거운동을 할 수 없으며, 벽보 부착이나 공보물 발송도 제한된다. 주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표가 어떤 공약을 내걸었는지, 도덕성과 역량을 갖추었는지 알 길이 없다. 견제와 감시 없는 권력은 독단과 부패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전문가들은 현행 선거 제도의 개혁 없이는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소선거구제 위주의 기초의원 선거구를 다인선거구제로 전면 개편하거나, 무투표 당선 예정자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주민 찬반 투표를 거치도록 하는 등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제언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민주주의는 경쟁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유권자의 표를 구하지 않고 권력을 얻는 정치인이 주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리 만무하다. 무투표 당선 500명 시대라는 차가운 수치는 우리 지방자치가 심각한 기능 부전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등이다. 제도의 맹점을 방치하는 한, 풀뿌리 민주주의는 기초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