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굳은 일흔의 할머니가 유모차를 끈다. 무릎 연골이 닳았지만 병원 갈 시간이 없다. 손주 낮잠 시간이 곧 그녀의 유일한 휴식이다. 이런 장면이 한국 어디서나 펼쳐지고 있다. 통계는 이 풍경을 숫자로 확인해준다. 영유아 자녀를 둔 맞벌이 가정 10곳 중 6곳, 그러니까 60%에 육박하는 가정에서 조부모가 주된 돌봄을 담당한다.

이것은 사랑이다. 동시에 노동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 두 가지를 교묘하게 혼동해왔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어온 것이다.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의 하루는 아침 7시 등원 준비로 시작해 저녁 7시 귀가 후 목욕까지 이어지는 12시간 노동이다. 여기에 주말 돌봄까지 더해지면 전일제 보육교사의 근무 강도를 훌쩍 넘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노동에 「할머니의 사랑」이라는 낭만적 이름을 붙이고 고개를 돌려왔다.

202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윤영호 교수 연구팀의 설문조사는 이 현실을 냉정하게 드러냈다. 임신과 육아로 인해 가정 내에서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상당수에 달했으며, 조부모 세대의 육아 스트레스 체감도는 젊은 부모 못지않았다. 60대 이후의 신체는 영유아의 리듬을 따라가기 힘들다. 수면 패턴이 무너지고, 만성 피로가 쌓이며, 사회적 관계는 단절된다. 노년의 삶이 설계되어야 할 시간에, 그들은 다시 기저귀를 간다.

물론 반론이 없지 않다. 조부모 돌봄은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어린이집의 낯선 환경보다 익숙한 할머니 품이 낫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실제로 가족 돌봄이 아이의 애착 형성에 긍정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논리의 함정은 분명하다.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의 희생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간호사의 헌신이 훌륭하다고 해서 무임금 야간 근무를 요구할 수 없듯이.

제도의 틈새는 넓다. 정부는 노인 일자리 사업을 늘리고, 출산 장려금을 키우고, 어린이집 정원을 확대한다. 그러나 실제로 돌봄 공백을 틀어막고 있는 조부모들에게 돌아오는 공식 지원은 극히 제한적이다. 일부 지자체에서 손자녀 돌봄 수당을 월 30만 원 안팎으로 지급하고 있지만, 시행 지역과 지원 규모는 들쭉날쭉하다. 게다가 노인의 법정 연령 기준이 2024년 현재 만 65세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60대 초반의 '젊은 조부모'들은 노인 복지 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그들은 노인도 아니고, 공식 보육 인력도 아니다.

지자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중앙정부의 제도 정비를 기다리는 사이, 당장 내일 아침도 할머니는 손주를 안고 버스에 오른다. 서울·경기 일부 자치구처럼 조부모 돌봄 수당을 월 50만 원 이상으로 현실화하고, 지원 대상 연령 기준을 만 60세 이상으로 낮추며, 정기 건강검진과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묶어 제공하는 방식이 현실적 대안이다. 비용이 문제라면 계산해보자. 어린이집 보육교사 1인의 월평균 인건비가 300만 원을 넘는 시대에, 조부모에게 지급하는 50만 원은 결코 과하지 않다.

우리는 흔히 「가족이 가족을 돌본다」는 말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 미덕 뒤에 국가가 숨어서는 안 된다. 공자는 「노인이 편안히 쉬도록 하겠다(老者安之)」고 했다.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숨을 고르는 할머니를 보며, 우리는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울리는지 돌아봐야 한다.

사랑은 착취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황혼은 봉사가 아니라 안식의 계절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