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0일, IOC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체결했던 12년짜리 e스포츠 올림픽 파트너십 계약을 공식 파기했다. 계약 체결 불과 1년여 만이다. 2024년 7월 사우디 리야드에서 화려하게 출범을 선언했던 '올림픽 e스포츠 게임'은 첫 번째 대회를 열어보지도 못한 채 무산됐다. e스포츠의 올림픽 편입이라는 거대한 구상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결렬이 단순한 계약 분쟁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 IOC는 파트너십 파기와 동시에 e스포츠의 올림픽 정식 종목화 논의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적인 e스포츠 올림픽 프레임워크를 재설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빈자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어느 나라, 어느 기구가 채우느냐가 향후 10년 e스포츠 산업의 판도를 결정할 수 있다.
사우디의 실패가 남긴 구조적 교훈
사우디아라비아가 e스포츠 올림픽 파트너십을 추진했던 배경은 명확했다. '비전 2030' 프레임 아래 스포츠·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국가 다각화 전략의 핵심 축으로 설정하고, e스포츠를 그 선두에 배치한 것이다. 실제로 사우디는 리야드에 e스포츠 월드컵을 유치하고, 게임 기업 인수에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는 등 자본력을 앞세운 공세적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IOC와의 결렬은 자본만으로 스포츠 거버넌스를 장악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IOC가 문제로 삼은 것은 단순한 금전 조건이 아니었다. 종목 선정 권한, 선수 보호 기준, 대회 운영 자율성 등 '규칙을 누가 만드는가'의 문제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e스포츠를 올림픽 체계에 편입시키려면 자본 투입 능력만큼이나 스포츠 문화와 제도적 신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번 파국이 증명했다.
한국이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한국은 e스포츠 종주국이라는 수식어를 20년 넘게 달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가 공중파 방송을 탔던 2000년대 초반부터,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챔피언십을 서울 상암 경기장 4만 관중이 메웠던 2014년까지. 한국은 세계 e스포츠 역사의 중심축이었다. 현재도 한국e스포츠협회(KeSPA)는 아시안게임 e스포츠 종목 운영 경험을 보유하고 있으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e스포츠 금메달 2개를 획득했다.
문제는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이 제도적 주도권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제e스포츠연맹(IESF)의 회원국은 130개국을 넘어섰고, 중국·미국·유럽 각국은 자국 게임 타이틀과 자본을 앞세워 글로벌 e스포츠 거버넌스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 한국이 선수 육성과 대회 운영에 강점을 갖고 있다면, 중국은 타이틀 IP를, 미국은 플랫폼과 자본을 무기로 삼는다. 게임 개발력과 IP 소유권 없이는 종목 선정 단계부터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
올림픽 편입의 현실적 과제와 한국의 전략 방향
IOC가 재설계하려는 e스포츠 올림픽 프레임워크에서 한국이 실질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선 세 가지 축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업계에서 나온다.
첫째는 IP 주권이다. 올림픽 e스포츠 종목으로 채택된 게임의 저작권을 누가 갖느냐는 단순한 상업적 문제가 아니다. 규칙 개정, 패치 일정, 선수 자격 기준까지 IP 소유자가 사실상 결정권을 쥔다. 한국 게임사들이 글로벌 경쟁력 있는 타이틀을 올림픽 적합 형태로 개발하고, 이를 IOC와의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거버넌스 참여다. IESF 내 한국의 역할을 현재보다 확대하고, IOC 스포츠 디렉터 레벨의 협상에 실무 전문가를 투입할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셋째는 선수 권익 표준화다. 올림픽 편입 과정에서 IOC가 가장 민감하게 보는 것은 선수 보호 체계다. 계약 표준화, 최저 처우 기준, 도핑 규정 준용 등 한국이 선제적으로 국제 기준을 제시한다면 신뢰 자산이 된다.
사우디의 자본이 실패한 자리에, 제도와 문화로 승부하는 전략이 통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한국이 그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는 정부·업계·협회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단정은 섣부르지만, 다음 기회가 지금만큼 유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