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열풍이 전 세계 산업 지도를 재편하는 가운데, AI 반도체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이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최대 격전지로 부상했다. 최근 발표된 시장조사업체의 자료에 따르면, 2025년 3분기 매출 기준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57%를 기록하며 선두를 달렸고, 삼성전자가 22%로 그 뒤를 이었다. 두 한국 기업이 세계 시장의 79%를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선전(善戰)에 안주할 수 없는 긴박한 흐름이 감지된다. 35%포인트에 달하는 양사 간의 점유율 격차와 후발 주자들의 거센 추격은 국내 반도체 산업에 새로운 차원의 전략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양강 구도 속 감지되는 격차와 글로벌 추격세
현재 글로벌 HBM 시장은 SK하이닉스가 독주 체제를 다지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추격하는 양상이다. SK하이닉스의 57% 점유율은 주요 글로벌 AI 칩 제조사와의 선제적 협력과 적기 공급망 확보가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22%의 점유율을 기록한 삼성전자는 차세대 제품의 공급 시점과 수율 안정화 단계에서 고전하며 격차가 벌어졌다. 여기에 미국 마이크론 등 글로벌 경쟁사들이 자국 정부의 전폭적인 보조금 지원을 등에 업고 미세공정 및 패키징 기술 고도화에 속도를 내면서, 한국 반도체의 독점적 지위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
HBM은 단순한 메모리 반도체가 아니라, 미세 공정과 고난도 적층(Stacking) 기술이 결합한 종합 예술에 가깝다. 특히 실리콘관통전극(TSV)과 첨단 패키징 기술력에 따라 제품의 수율과 방열 성능이 결정된다. 이는 단순히 설비 투자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단기간에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선두 기업은 기술적 '초격차'를 유지해야 하고, 후발 주자는 미세공정의 한계를 극복할 게임 체인저 기술을 확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구조다.
R&D 세제 혜택과 인프라 지원, '골든타임' 확보의 열쇠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R&D 지원책 정비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과 일본, 대만 등 주요 경쟁국들은 천문학적인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직접 보조금보다는 세액공제 중심의 간접 지원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마저도 일몰 기한 연장이나 공제율 확대를 두고 매년 정치적 논쟁을 겪고 있다. 차세대 HBM 개발에 필요한 R&D 비용과 첨단 패키징 라인 구축에 들어가는 대규모 투자를 기업 홀로 감당하기에는 리스크가 지나치게 크다.
정부 발표와 업계의 분석을 종합하면,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세액공제 범위를 첨단 패키징 및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전반으로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핵심 거점의 전력 및 용수 공급 등 필수 인프라 구축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속도감 있는 행정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술 개발의 속도가 생존을 결정하는 반도체 산업에서 인프라 구축 지연은 곧 시장 퇴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곧 기술'… 고질적 인재 유출 방지와 육성 시급
결국 초격차 기술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현재 국내 반도체 업계는 만성적인 고급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HBM과 같은 첨단 메모리 분야는 설계, 공정, 패키징을 아우르는 융합형 인재가 필수적이지만, 국내 대학 및 대학원 공급 체계는 업계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중국, 대만 등 해외 경쟁사들이 파격적인 처우를 제시하며 국내 핵심 연구 인력을 영입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어, 기술 유출 우려가 고조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장학금 지원을 넘어, 산학협력 연구 과제를 대폭 늘리고 석·박사급 연구원들이 국내에서 지속해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 내부적으로도 핵심 인재에 대한 보상 체계를 현실화하고, 국가 차원에서는 핵심 기술 인력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및 전직 제한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제도적 보완이 병행되어야 한다. 인재 확보와 유출 방지는 기업의 문제를 넘어 국가 경제 안보의 핵심 과제다.
HBM 주도권 경쟁은 단기적인 매출 싸움이 아닌, 향후 수십 년간 이어질 AI 시대의 패권을 결정짓는 장기전이다. SK하이닉스의 독주와 삼성전자의 추격이라는 구도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시장의 최정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관이 원팀이 되어 R&D 투자와 인재 육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과거의 영광은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