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1억 8천만 원. 스물여섯 살 청년이 3년간 편의점 야간 알바로 모은 전부였다. 그 돈은 등기부등본에 빼곡히 쌓인 선순위 근저당 뒤에 묻혔고, 경매 낙찰가는 피해자의 몫을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집은 사라졌고, 청년은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수치가 되기 전의 전세사기다. 숫자 이전의 얼굴이다.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LH에 피해 주택 매입을 사전 협의 요청한 건수는 총 2만 2,628건에 달한다. 이 중 67.6%, 즉 1만 5,302건이 '매입 가능' 판정을 받았다. 숫자만 보면 제도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매입 가능'과 '피해 구제'는 같은 말이 아니다. 판정은 희망의 언어지만, 실제 매입까지 이르는 길은 절차와 예산과 시간의 미로다. 피해자는 그 미로를 집 없이, 보증금 없이 걸어야 한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은 2023년 제정됐다. 피해자 인정 요건, 경·공매 유예, LH 우선매수권 등 여러 장치를 담았다. 입법 취지는 선명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법은 종종 텍스트로만 존재한다. 피해자 인정 절차가 길고, 요건이 까다로우며, 인정을 받아도 실질적 주거 대안이 즉각 주어지지 않는다. 법이 존재한다는 것과 법이 작동한다는 것 사이의 거리를 피해자들은 매일 걷고 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무분별한 공공 매입은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 재원의 한계, 임차인 스스로의 계약 주의 의무를 완전히 면제할 수 없다는 논리는 나름의 근거를 갖는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하지만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전제가 있다. 임차인이 정보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가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깡통전세 여부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감정평가 비용, 법률 자문, 등기부 해독 능력 — 이것이 사회초년생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조건이었는가. 제도의 실패를 개인의 부주의로 돌리는 것은, 불공정한 경기장에서 진 선수에게 더 열심히 뛰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근본적 처방은 사후 구제보다 사전 예방 구조의 재설계에 있다. 계약 단계에서 임차인이 선순위 채권 정보를 자동으로 통보받는 시스템, 전세보증보험 가입을 실질적으로 강제하는 기준, 공인중개사의 설명 의무 강화와 그에 따른 책임 소재의 명확화가 필요하다. 청년 임차인에게 계약 전 법률 상담을 지원하는 지역 단위 공공 서비스도 검토할 만하다. 집을 잃은 후의 구제보다, 집을 잃지 않도록 하는 설계가 먼저다.
전세 제도 자체에 대한 질문도 피할 수 없다. 집주인의 레버리지와 세입자의 리스크가 구조적으로 어긋난 이 제도는, 저금리 시대의 산물이었다. 금리가 오르는 순간 그 어긋남은 재앙이 됐다. 장기적으로 월세 중심 임대차 시장으로의 이행, 공공임대 확대, 전세 대출 구조 개편이 병행되지 않으면 특별법은 반복되는 사태마다 임시 봉합에 그칠 것이다.
1만 5,302건의 '매입 가능' 판정이 실제 이사 날짜로, 새 열쇠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그것은 숫자일 뿐이다. 법의 완성은 조문이 아니라 그것이 닿는 삶에서 측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