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어느 폐교 운동장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낡은 평상에 누워 별을 센다. 스마트폰은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다. 서울 직장에서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스물여덟 살 청년이, 그날 밤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촌캉스다. 럭셔리 리조트도, 해외 배낭여행도 아니다. 그냥, 낡고 느리고 불편한 곳으로 가는 것.

데이터 컨설팅 기업 피엠아이(PMI)가 2024년 7월 전국 20~69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0.2%가 여름휴가 계획으로 촌캉스를 꼽았다. 셋 중 하나다. 이 수치는 단순한 여행 트렌드 통계가 아니다. 지금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디로, 왜 달아나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좌표다.

촌캉스를 소비 트렌드로만 읽는 시각도 있다. 「복고」를 상품화한 자본의 영리한 포장이며, 실제 농촌의 고령화와 소멸을 외면한 채 그 낭만만 취하는 위선적 소비라는 비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감성 사진 한 장을 위해 폐가를 찾고, 전통 막걸리 한 잔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행위가 농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 비판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나는 그 비판이 절반만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시골로 향하는 충동의 뿌리를 「소비의 언어」로만 번역하는 순간, 우리는 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다. 체호프는 「세 자매」에서 모스크바를 그리워하는 세 자매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모스크바가 아니었다. 지금 이 삶이 아닌 다른 삶, 더 온전한 자신으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촌캉스를 택하는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시골이 목적지가 아니다. 잠시 멈출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다.

이 세대가 자란 환경을 생각해보면 이해는 어렵지 않다. 유튜브 알림, 카카오톡 메시지, 업무용 슬랙 채널, 인스타그램 피드. 깨어 있는 매 순간 무언가가 반응을 요구한다. 접속이 곧 존재 증명인 세계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에 가깝다. 닭 울음소리와 흙내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연결을 끊어낼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자, 내면의 소음을 잦아들게 하는 음소거 버튼이다.

아날로그가 위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느리기 때문이다. 장작불은 빠르게 피울 수 없고, 된장찌개는 기다려야 완성된다. 느림은 비효율이 아니라 감각의 회복이다.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제거해버린 것, 즉 실패할 여지, 기다림의 밀도, 손으로 만지는 질감 같은 것들이 시골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온전해진다.

물론 촌캉스가 구조적 해법은 될 수 없다. 3박 4일의 탈출이 끝나면 다시 서울의 월세방과 야근이 기다린다. 위로와 해결은 다르다. 그 차이를 알면서도 사람들은 떠난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탓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위로를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몸짓이기 때문이다.

흙은 더럽지 않다. 우리가 잊고 있던 속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