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아랍 산유국들이 원유 수출을 끊었을 때 서울 시내 네온사인이 일제히 꺼졌다. 주유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정부는 차량 2부제를 시행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구조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은 여전히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땅에서, 중동의 지정학적 체온에 따라 난방비와 물가가 출렁이는 나라다.
그 중동에서 의미심장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핵 협상이 다시 궤도에 오르며 양측이 종전에 준하는 합의를 모색하고 있다는 신호가 나온다. 수십 년간 제재로 묶여 있던 이란산 원유가 국제 시장에 풀릴 경우, 하루 수백만 배럴 규모의 공급 증가가 유가를 끌어내릴 것이라는 분석이 에너지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10달러 안팎의 하락 압력을 거론하는 시각도 있다. 숫자가 크든 작든, 방향은 분명하다. 한국 입장에서 나쁜 소식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의 중동 원유 의존도는 서서히 낮아지는 추세다. 2024년 71.5%였던 중동 의존도는 2025년 69.1%로 떨어졌고, 2026년 1~5월 누계 기준으로는 62.8%까지 내려왔다. 반면 북미산 원유 비중은 꾸준히 늘었다. 셰일 오일의 부상과 에너지 외교 다변화가 맞물린 결과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여전히 수입 원유의 6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그 좁은 바닷길 하나가 막히면 한국 경제가 즉각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란 제재 완화를 낙관하는 시각도 있다. 중동 정세가 안정되면 에너지 공급망 리스크가 줄고, 이란산 원유를 직도입할 길도 열린다는 논리다. 실제로 제재 이전 한국은 이란의 주요 원유 수입국 중 하나였다. 그 연결을 복원한다면 공급선 다변화라는 목표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그러나 낙관론에는 반드시 삽입해야 할 단서가 있다. 중동 평화는 선언이 아니라 정착이 문제다. 이란 핵 합의는 2015년에도 한 번 이루어졌다가 2018년 일방적 파기로 무너진 전례가 있다. 지역 내 종파 갈등, 이스라엘과의 대립 구도, 예멘·시리아의 잔불은 어느 하나의 합의로 소화되지 않는다. 평화 협정이 서명대 위에 오르는 순간과 유전 밸브가 실제로 열리는 순간 사이에는 언제나 길고 험한 간극이 존재한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그 간극을 견딜 수 있는 체력이다. 이란 리스크가 완화되더라도 중동 의존도를 절반 아래로 낮추는 구조 개편은 멈춰선 안 된다. 북미,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로 수입선을 분산하는 한편,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를 높여 원유 수입량 자체를 줄이는 것이 장기적 해법이다. 평화의 배당금을 기대하되, 그 배당금에 기대어 구조 개혁을 늦추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외교적으로도 셈법이 필요하다. 미·이란 합의가 성사되는 과정에서 한국은 단순한 수혜자로 앉아 있을 수 없다. 이란 핵 합의 복원 이후 어떤 조건으로 원유 교역을 재개할지, 한국 기업들이 이란 에너지 인프라 재건에 참여할 여지는 있는지, 미국과의 동맹 틀 안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지—이 모든 것이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준비돼야 할 외교 과제다.
사막의 모래바람은 멈추는 법이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 바람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 그 찰나에 난로 앞에서 손만 녹이다 끝낼 것인지, 아니면 연료 창고를 새로 짓는 데 쓸 것인지—선택은 우리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