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신문이 쌓였다. 우유가 문 앞에 그대로 있었다. 이웃집 할머니의 죽음을 처음 눈치챈 건 경찰도, 복지사도 아니었다. 같은 복도를 쓰는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옆집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벨을 누르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며칠을 더 혼자였을 것이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분의 1을 훌쩍 넘어선 지금, 이 나라에서 혼자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 되어버렸다. 통계는 냉정하다. 고독사로 집계되는 사망자 수는 해마다 늘고 있으며, 발견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있다. 숫자보다 무거운 건 그 시간의 무게다.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흘러간 하루하루.
지난 6월, 보건복지부는 대구광역시를 찾아 고독사 예방 현장을 직접 점검했다. 노인일자리 사업과 연계한 '즐거운 생활지원단'이 그 중심에 있었다. 노인이 노인을 살피는 구조, 일자리이자 돌봄이기도 한 이 방식은 제도의 언어로는 '인적 안전망'이라 불린다. 그러나 현장의 언어로 옮기면 다르다. 「내가 이 동네에서 할 일이 있다」는 감각, 그리고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는 느낌. 그것이 실은 가장 강력한 생존 장치다.
일본은 이 문제를 먼저 겪었다. 1990년대부터 고독사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 일본은 지역포괄지원센터와 민간자원봉사 네트워크를 결합해 이른바 '지역 미닫이문 사회'를 실험해왔다. 강한 유대가 아니라 열린 통로가 핵심이었다. 꼭 친해야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낯선 사람에게도 택배 하나를 대신 받아줄 수 있다는 것, 그 아주 작은 접촉이 고립을 막는다는 것을 일본은 시행착오로 배웠다. 한국은 그 교훈을 참고하면서도, 정작 실행 속도는 여전히 느리다.
물론 반론도 있다. 프라이버시 침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진지하게 들을 만하다. 「내 삶에 간섭하지 말라」는 요구는 개인의 권리이며, 이웃의 시선이 감시로 변질될 위험도 실재한다. 복지 서비스가 촘촘해질수록 오히려 인간적 관계가 계약적으로 변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연결 자체를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감시와 돌봄은 다르다. 차이는 결국 태도의 문제, 강제냐 자발이냐의 문제다.
「즐거운 생활지원단」이라는 이름이 내게는 오래 남는다. 즐거움과 돌봄을 한 이름에 담으려 한 감각. 돌봄이 부담이 아닌, 일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이것이 작동하려면 제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자체가 예산을 짜고, 복지사가 방문 주기를 설계해도, 결국 마지막 문을 두드리는 건 사람의 손이다. 공문서가 아니라 안부 인사로, 정책이 아니라 눈빛으로 전달되는 연결.
느슨하다고 약한 게 아니다. 팽팽하게 조여진 그물은 한 군데 끊기면 무너진다. 느슨하게 엮인 망은 끊겨도 옆으로 버틴다. 이 나라에 지금 필요한 건 거대한 복지 시스템의 증설이 아니라, 복도에서 눈이 마주칠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문화다. 그 고갯짓 하나가, 때로는 마지막 날을 막는다.
이웃은 제도가 닿지 않는 곳에 산다. 그래서 이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