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여름, 스티븐 스필버그는 관객들에게 바다를 두려워하는 법을 가르쳤다. 두 음표로 이루어진 첼로 선율이 깔리면 사람들은 해변 의자에서 등을 곧추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셀룰로이드 위의 공포였다. 스크린이 꺼지면 두려움도 꺼졌다.

이제 그 스위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의 집계는 짧고 명확하다. 올해 1월부터 6월 20일까지 동해안에서 혼획된 대형 상어가 46건. 지난해 같은 기간의 12건과 비교하면 불과 반년 만에 3.8배가 뛰었다. 혼획이란 의도하지 않은 포획이다. 어부들이 노린 것이 아니라, 상어가 먼저 그물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동해는 원래 상어의 바다가 아니었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수온이다. 동해 표층 수온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해 뚜렷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난류성 어종의 분포 북방 한계선이 해마다 위로 밀려 올라오고 있다. 상어는 먹이를 따라 움직인다. 따뜻해진 동해로 오징어와 고등어가 올라오면, 그것을 쫓는 포식자도 함께 올라온다. 생태계의 논리는 단순하고 냉정하다.

물론 46건이라는 수치를 두고 「아직 해수욕객에게 직접적 위협이 된 사례는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혼획은 어망 안의 이야기이고, 피서철 연안과는 거리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생태계 경보는 항상 사건이 터진 뒤에야 읽히는 법이다. 문제는 개별 사고의 발생 여부가 아니라, 그 가능성의 구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동해가 상어의 서식 가능 공간으로 편입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조건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영화 「죠스」가 남긴 진짜 유산은 공포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시장이 해변을 닫기를 거부하는 장면, 경제적 손실을 우려해 위험 신호를 묵살하는 의사결정 구조—그것이 스필버그가 진짜 겨냥한 과녁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동일한 구조 앞에 다시 서 있다. 수온 상승은 어업 피해로 이어지고, 어업 피해는 지역 경제를 흔들고, 그 불편한 진실은 성수기 관광 홍보 문구 뒤로 밀려나기 쉽다.

상어는 악당이 아니다. 수억 년 동안 바다의 균형을 유지해온 생명체가 제 논리대로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악당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대기로 밀어 넣은 탄소의 누적이며, 상어의 출현은 그 결과를 바다가 육안으로 보내오는 신호다. 징후를 읽지 못하는 것이 재앙이 아니라, 읽고도 외면하는 것이 재앙이다.

동해의 그물에 걸린 상어 한 마리는 낯선 불청객이 아니다. 우리가 수십 년간 대기에 써넣은 문장의, 바다가 보내온 답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