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 사과 농가를 30년째 일궈온 한 농부는 요즘 봄꽃 개화 시기가 "10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꽃이 일찍 피는 만큼 냉해 피해도 잦아졌고, 여름 고온으로 착색이 제대로 안 되는 해도 늘었다. 반면 강원도 정선과 양구에선 사과 신규 재배 농가가 조용히 늘고 있다. 한반도의 농업 지도가 서서히, 그러나 돌이키기 어려운 속도로 바뀌고 있다.

농촌진흥청이 2022년 발표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분석 결과는 그 변화의 규모를 숫자로 보여준다. 국내 사과 재배 적지 면적은 2020년 기준 약 469만 8,000헥타르에서 2050년에는 125만 헥타르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됐다. 불과 30년 사이에 재배 가능 면적이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2090년에는 사실상 재배 적지 자체가 소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구 사과', '충주 사과'로 대표되던 주산지 지명이 머지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북상하는 재배선, 이동하는 산지

사과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 연평균 기온은 지난 100년간 약 1.8도 상승했다. 이 온도 상승이 과일 지도를 통째로 밀어 올리고 있다. 제주도 특산물로 여겨지던 감귤은 이미 전남 해안가와 경남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상업적 재배가 가능해졌다. 대구·경북 중심이던 복숭아 주산지는 경기·강원 방향으로 꾸준히 북진 중이다. 강원도 일부 고랭지는 이제 사과 재배의 새로운 최전선이 됐다.

문제는 이 이동이 '기회'인 동시에 '혼란'이라는 점이다. 강원도로 재배지가 올라가면 새 산지가 생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십 년간 쌓인 품종 노하우와 유통 인프라, 농가 기술이 하루아침에 따라오지는 않는다. 경북 사과 농가가 강원도로 이주할 수도 없고, 기존 재배지에선 생산량 감소와 품질 저하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동하는 것은 기후지만,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것은 현장의 농민이다.

소비자 식탁까지 바뀐다

재배지 변화는 곧 가격과 공급 안정성에 직결된다. 사과는 한국인의 대표 과일이자 명절 선물의 기준점이다. 재배 적지가 줄어들면 생산 비용은 오르고, 이상기후로 인한 작황 변동성도 커진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사과 가격은 이상고온과 냉해가 겹치는 해마다 급등했고, 소비자 체감 물가에 직접적인 충격을 줬다.

일부 농업 전문가들은 품종 전환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고온에서도 착색이 잘 되는 신품종 개발, 아열대성 과일 도입 확대가 대안으로 거론된다. 망고, 애플망고, 파파야 등의 국내 재배 면적은 최근 10년 사이 눈에 띄게 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기존 농가의 전환 비용과 시장 안착까지의 시간이 만만치 않다는 현실적 한계를 안고 있다.

농업 정책이 선택해야 할 것들

재배 한계선이 올라가는 현상은 기술이나 개별 농가의 노력만으로 막을 수 없다. 농업진흥지역 지정 기준, 주산지 육성 정책, 품종 보급 체계 모두 현재의 기후를 전제로 설계돼 있다. 기후 시나리오를 정책 설계의 기본 변수로 삼지 않으면, 10년 뒤 정책은 이미 사라진 재배 적지를 보호하는 데 예산을 쓰는 꼴이 된다.

강원도 사과밭이 늘어나는 풍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반도 기후변화의 가장 조용하고 확실한 증거다. 우리가 그 사과를 베어 무는 동안, 재배 지도는 이미 다음 줄로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