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아연·연·금·은의 세계 최대 제련소를 보유한 기업이 적대적 인수 시도의 한복판에 섰다. 고려아연의 시가총액은 분쟁이 격화되던 시점 20조 원을 넘나들었고, 지분 확보 경쟁에 나선 양측은 수조 원 규모의 공개매수를 잇달아 선언했다. 단순한 오너 일가 간 갈등이 아니었다. 2차전지 소재 공급망의 핵심 고리가 걸린 싸움이었다.
고려아연은 2024년 9월 25일 정부에 신청한 국가핵심기술 판정 신청이 승인되면서 2차전지 핵심 소재인 전구체 원료 관련 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됐다. 이는 단순한 방어 수단이 아니다. 해당 기술이 외국 자본의 지배하에 넘어갈 경우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에 직결된다는 정부의 공식 판단이다.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의 경영권이 바뀌려면 산업통상자원부의 사전 검토를 거쳐야 한다. 분쟁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국가 전략 자산으로서의 고려아연
고려아연은 아연 제련 기준 세계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이다. 단순 제련에 그치지 않는다. 황산코발트·황산니켈 등 2차전지 양극재 전구체 핵심 원료를 생산하며, 온산제련소 단지는 사실상 국내 비철금속 공급망의 심장부 역할을 한다. 반도체·방산·전기차 모두 이 공급망과 연결돼 있다. 이런 기업의 지배구조가 단기 자본 논리에 따라 재편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핵심 기술 유출, 생산 전략의 외부 종속, 장기 투자 중단 가능성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산업계의 분석이다.
분쟁 과정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는 국내 자본시장의 방어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가 하는 점이다. 공개매수 응찰률을 높이기 위한 주가 프리미엄 경쟁,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한 자사주 활용 논란, 소수 주주 권익 보호 장치의 미비—이 모든 요소가 분쟁 과정에서 동시에 표출됐다. 적대적 M&A에 대응하는 제도적 수단이 선진국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지적이 법조계와 학계에서 잇따라 나왔다.
제도 공백이 만들어 낸 빈틈
미국·일본·독일은 핵심 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심사 체계를 오래전부터 정비해왔다. 미국의 CFIUS(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는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래를 심사할 수 있고, 일본은 2020년 외환법 개정으로 주요 업종의 외국인 지분 취득 신고 기준을 1%로 낮췄다. 한국의 산업기술보호법도 국가핵심기술 기업 M&A에 대한 심사 조항을 두고 있지만, 국내 자본 간 분쟁이나 우호·적대 지분의 복잡한 구조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분쟁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외국 자본의 직접 개입 여부와 무관하게, 경영권 불안정 자체가 기업의 장기 투자 결정을 지연시킨다는 데 있다. 고려아연이 추진해온 이차전지 소재 수직계열화, 수소 환원 제련 등 장기 프로젝트들은 경영권 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의사결정 구조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미래 산업을 향한 투자 타이밍은 한 번 놓치면 회복하기 어렵다.
이 싸움이 남긴 질문
경영권 분쟁 자체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한국 산업 생태계에 제기한 질문들이다. 국가 전략 자산을 보유한 기업의 지배구조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지켜야 하는가. 자본시장의 효율성과 국가 산업 안보는 어디서 충돌하고, 어디서 균형을 찾을 수 있는가. 국가핵심기술 지정이라는 사후 조치만으로 이런 분쟁을 예방할 수 있는가.
고려아연 사태는 한 기업의 오너십 갈등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한국이 2차전지·비철금속·소재 산업에서 쌓아온 경쟁력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구조적 물음으로 확장됐다. 그 물음에 대한 제도적 답변이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채로, 다음 분쟁의 무대는 이미 어딘가에 준비되고 있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