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외환시장으로 나오지 않고 기업 예금 계좌에 묶여 있다. 지난 2일 기준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의 기업 달러예금 잔액은 483억달러로 집계됐다. 3월 말 410억달러에서 4개월 사이 73억달러가 늘어난 것으로, 증가율은 약 18%에 달한다.
기업들이 환전을 미루는 이유는 원화값 하락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국 월간 수출이 역사상 처음으로 1000억달러의 벽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유입된 달러의 상당 규모가 환전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기업 금융계좌로 바로 입금되었다. 달러당 환율이 1400원대와 1550원대 사이에서 움직이는 상황에서 환전 시점에 따라 원화 수취액의 차이가 10%에 이르기 때문이다. 또한 한미 금리 역전이 장기화하면서 달러 예금으로 보유하는 것이 이자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갖게 됐다.
달러 파킹 현상은 외환시장의 기초 수급 구조를 뒤흔들고 있다. 수출기업의 달러가 환전되면 시장에 달러 매도 물량으로 등장해 원화값을 떠받친다. 하지만 기업이 환전을 건너뛰고 달러를 예치하면 이 공급이 사라진다. 경상수지 흑자가 쌓여도 장부 위 흑자일 뿐, 실제 시장에 도는 달러는 증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편 해외투자를 늘리는 개인 투자자들의 달러 수요는 계속되고 있어, 공급 부족으로 인한 원화 약세 악순환이 심화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나섰다. 지난달 재정경제부와 산업통상부는 주요 수출기업들과 간담회를 열고 수출대금의 신속한 환전을 당부했다. 환율 대응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수출기업의 환전 현황을 직접 점검하기로 한 것도 달러예금 증가가 외환 수급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음을 보여준다.
다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요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국면에서 기업이 즉각 환전에 나서는 것은 그 자체로 경영 리스크라며, 원화의 매력을 되살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