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에 사는 40대 직장인 A씨는 지난해 반려견이 슬개골 탈구 수술을 받으며 300만 원을 단숨에 썼다. 마취비, 검사비, 입원비가 따로따로 붙었다. 「처음엔 그냥 다리를 절뚝이는 줄만 알았는데, 병원에 갔다가 지갑이 텅 비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그 뒤로 펫보험에 가입했다. 늦었지만, 다음번을 대비해서다.

A씨 같은 보호자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국내 펫보험 원수보험료는 1,287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도 799억 원에서 61.1% 급증한 수치다. 처음으로 1,000억 원대를 돌파했다. 숫자 하나가 시장의 성격을 통째로 바꿨다. 이제 펫보험은 일부 애호가의 '사치'가 아니라,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시대의 필수 리스크 관리 수단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

'펫 휴머니제이션'이 만든 의료비 수요

반려동물을 인간처럼 여기는 이른바 '펫 휴머니제이션(Pet Humanization)' 현상은 소비 행태를 근본부터 바꿔놓았다. 과거엔 동물병원이 예방접종이나 간단한 처치 위주였다면, 지금은 MRI 촬영, 암 수술, 신장 투석까지 이루어진다. 의료 수준이 높아진 만큼 비용도 올랐다. 동물의료 관련 업계 추산으로는 반려동물 1마리의 연간 의료비가 평균 수십만 원에서 중증 질환 발생 시 수백만 원을 훌쩍 넘는다. 문제는 이 비용이 전혀 표준화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동물병원마다 진료비가 제각각이고, 비급여 항목이 사실상 무제한이다. 보호자 입장에선 보험 없이는 도박에 가까운 지출 구조다.

이 수요가 시장을 키웠다. 국내 주요 손해보험사들이 앞다퉈 펫보험 상품을 내놓고 있고, 일부 핀테크 기업들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보장 범위도 넓어졌다. 입원·수술 위주에서 통원 치료, 검사비, 치과 처치까지 포함하는 상품이 등장했다. 그러나 가입률은 여전히 낮다. 국내 반려동물 보유 가구가 전체의 약 4분의 1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험 침투율은 아직 한 자릿수에 머문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도 정비의 속도, 시장 성장을 따라가고 있나

문제는 제도다. 펫보험이 급성장하는 동안 동물 진료비 체계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동물병원 진료비 공시제가 일부 시행되고 있지만, 항목 기준이 통일되지 않아 소비자 비교가 어렵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표준 진료 기준 없이는 보험금 심사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동물 등록 체계도 허점이 많아 보험 가입 후 다른 동물로 청구하는 도덕적 해이 사례가 보고된다.

정부는 동물 진료비 관련 고시 정비와 함께 펫보험 활성화를 위한 기반 구축에 나서고 있다. 동물등록 의무화 범위를 넓히고, 진료비 표준화를 위한 수가 논의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수의사 단체와 보험업계, 소비자 단체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 사례를 보면 스웨덴·영국은 펫보험 가입률이 40%를 넘는다. 진료비 표준화와 보험 제도가 함께 성숙한 결과다. 한국은 시장은 달리기 시작했는데, 제도가 출발선에서 신발 끈을 묶고 있는 형국이다.

보호자는 원한다, 제도는 답해야 한다

반려동물을 위해 수술비 수백만 원을 기꺼이 쓰는 보호자들이 원하는 건 단순하다. 예측 가능한 비용, 믿을 수 있는 보험, 납득할 수 있는 진료비다. 그것이 충족될 때 펫보험 시장은 단순한 고성장 지표를 넘어 실질적인 사회 안전망으로 기능할 수 있다.

1,287억 원이라는 숫자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필요한 건 그 깊이만큼의 제도적 뒷받침이다. 시장이 이미 문을 열었다. 제도가 그 문을 제대로 달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