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부터 보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약 3년 동안 대통령 및 권한대행이 행사한 법률안 거부권(재의요구권)은 총 42건에 달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25건, 최상목 권한대행이 9건, 한덕수 권한대행이 나머지를 행사했다. 헌정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다. 비교하자면, 역대 대통령 전체를 통틀어 행사된 거부권 건수가 수십 건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일 정부에서 42건이라는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거부권의 구조: 입법 다수와 행정 거부의 충돌

거부권 행사가 이처럼 집중된 데는 구조적 배경이 있다. 22대 국회에서 야권은 개원 직후부터 압도적 의석을 바탕으로 단독 법안 처리를 반복했다. 여당은 수적 열세를 법안 심의 단계에서 뒤집을 수 없었고, 행정부는 거부권으로 응수하는 패턴이 고착됐다. 야당이 법안을 통과시키면 대통령(혹은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국회는 재의결을 시도하지만 3분의 2 가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법안이 폐기되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이 구조는 단순한 여야 갈등이 아니다. 입법부와 행정부 간 권한 충돌이 제도적 안전판 없이 맞부딪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 충돌이 정치적 쟁점 법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간호법, 방송법,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등 각각의 법안은 해당 직군과 산업에 직결된 규범이었고, 거부권 이후에도 관련 제도의 공백은 메워지지 않았다.

민생 법안의 공전: 비용은 누가 치렀나

간호법을 예로 들면,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는 이 법안은 수십 년간 현장 혼란을 야기해온 제도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국회를 통과했으나 거부권으로 폐기됐고, 이후 대안 입법 논의는 정쟁 속에 묻혔다. 노동 현장의 하청 구조를 둘러싼 쟁점을 담은 노란봉투법도 마찬가지다. 찬반 입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법안이 통과도 폐기도 아닌 채 반복 처리되는 동안 현장의 불확실성은 누적됐다.

국회 입법조사처 등에 따르면, 법안 처리 지연이 길어질수록 행정 집행 공백과 민간 분쟁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법안이 통과되고 거부권이 행사되며 재발의되는 과정에서 평균 수개월에서 1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 시간 동안 해당 분야 종사자와 기업은 규범의 공백 속에서 판단을 유보하거나 소송으로 분쟁을 해결해야 했다.

협치 실종의 진단: 제도 탓인가, 의지 탓인가

협치(協治)는 제도가 아니라 선택이다. 거부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이다. 야당의 단독 입법 역시 헌법이 허용하는 다수결 원리의 행사다. 두 행위 모두 위헌이 아니다. 그러나 합헌적 수단이 반복적으로 충돌할 때, 제도는 작동하되 정치는 기능을 잃는다.

비교 사례를 보면, 여소야대 구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드물지 않다. 미국에서는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이 다를 때 초당파 협상이나 행정명령 활용, 또는 입법 교착이 명시적 타협으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독일의 연정 시스템은 구조 자체가 타협을 강제한다. 한국은 어떤 장치도 타협을 강제하지 않는다. 국회법상 여야 원내대표 협상이나 국정협의체 운영 같은 비공식 채널이 있지만, 이는 의지가 있을 때만 작동한다.

현재 국회의 문제는 법안의 방향성이 아니라 처리 방식에 있다는 지적이 정치권 일각에서도 나온다. 법안을 심의 없이 일괄 처리하고, 거부권으로 무력화하고, 재발의하는 사이클은 입법의 질을 떨어뜨린다. 충분한 심의 없이 통과된 법안은 집행 단계에서 빈틈을 드러내고, 거부권으로 폐기된 법안은 해당 분야의 법적 공백을 그대로 남긴다.

42건의 거부권이 남긴 것은 숫자가 아니다. 처리되지 못한 채 쌓인 현장의 문제들이다. 정치가 소모되는 동안 그 비용은 조용히 다른 곳으로 전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