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세 번 울렸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AI 시스템은 이를 「위험 신호」로 분류했다. 출동한 공무원이 문을 열었을 때, 노인은 그저 외출 중이었다. 오작동이었다. 하지만 진짜 오작동은 따로 있었다. 그 노인이 며칠째 밥을 굶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화 한 통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

고독사를 막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AI 안부 전화 서비스가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퍼지고 있다. 음성 인식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이상 징후를 담당 공무원에게 알린다. 기술은 분명 영리하다. 그러나 현장 실무자들은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단순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위험 신호가 발령되고, 반대로 전화를 받아 「괜찮다」고 대답해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자기방임 상태인 경우를 시스템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들이 지적하는 이 간극은 작은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인간의 고독을 번역하는 방식 자체의 한계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담당 공무원 한 명이 감당해야 할 대상자 수는 이미 현실적인 한계를 넘어선 상태다. AI가 위험 신호를 보내도 실제로 찾아갈 인력이 부족하다. 기술은 촘촘한 그물처럼 보이지만, 그 그물을 실제로 끌어올릴 손이 없는 셈이다. 시스템은 돌아가고, 경보음은 울리고,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다.

물론 AI 안부 전화가 가진 가치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독거노인이 수백만에 달하는 상황에서 인력만으로 전수 관리는 불가능하다. 기술이 최소한의 그물망을 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포드가 AI 품질관리 실패 이후 숙련 엔지니어 350명을 다시 불러들였다는 소식은 의미심장한 비유가 된다. 기술은 사람의 경험과 감각을 대체하지 못한다. 보조할 뿐이다.

시인 정현종은 썼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AI 전화가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어마어마함」이다. 목소리의 떨림, 냄새, 눈빛, 오래된 라디오 소리. 누군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데이터가 아닌 감각으로 확인된다. 이웃이 이웃을 알아보는 방식이 그랬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결국 그 감각의 공동체다. 아파트 복도에서 마주치던 인사, 김치 한 포기를 건네던 손, 불빛이 사흘째 꺼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던 옆집 사람. 그 소소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던 교류가, 사실은 가장 정밀한 안전망이었다. 알고리즘이 분류하지 못하는 「자기방임」을 이웃은 냄새로 알았고, 표정으로 읽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AI를 걷어내자는 주장이 아니다. AI가 닿지 못하는 자리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예산과 구조가 기술 도입 예산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경로당 한 곳을 유지하는 비용, 마을 코디네이터 한 명을 두는 비용이, AI 시스템 구축 비용보다 훨씬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문을 두드린다.

전화는 울렸다. 이제 누군가 직접 걸어가야 한다. 온기는 전송되지 않는다. 전달될 뿐이다,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