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광장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물었다. 「용기란 무엇인가」, 「정의는 어디서 오는가」. 2500년 전 그 질문들이 지금도 살아남은 건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가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언가를 묻기 전에 이미 검색창에 손이 가 있다.

챗GPT에 「내일 발표 자료 만들어줘」라고 입력하면 3분 안에 슬라이드 구성안이 나온다. 「이 계약서의 독소 조항을 찾아줘」라고 하면 변호사 수준의 검토가 돌아온다. AI는 묻는 자에게 답한다. 빠르게, 그리고 놀랍도록 그럴듯하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점점 더 「답을 받는 법」에만 익숙해지고,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구성하는 능력을 잃어간다는 것.

업계 조사에 따르면 AI 도입 이후 단순 정보 검색이나 요약 업무를 수행하는 직군의 채용 수요는 눈에 띄게 줄어든 반면, 이른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관련 수요는 23% 이상 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란 결국 AI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다. 시장은 이미 알고 있다. 답을 생산하는 능력은 기계에 넘어갔고, 질문을 설계하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는 것을.

물론 반론도 있다. AI가 내놓는 답이 충분히 정교하다면, 질문 역시 AI가 더 잘 생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AI 모델은 사용자 의도를 유추해 스스로 질문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의 핵심은 기술적 정교함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하는 가치 감각에 있다. 어떤 문제를 풀 것인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그 결정의 출발점에 있는 질문은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경험과 윤리와 용기에서 나온다.

교육 현장도 흔들린다. 학생들이 AI로 과제를 완성하는 시대에, 교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표절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왜?」라고 묻는 습관을 잃어가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음」을 악의 근원으로 지목했다. 생각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질문하지 않는 인간은, 그 어떤 도구를 쥐고 있어도 결국 도구에 쥐어진 인간이 된다.

AI 시대에 필요한 질문은 두 종류다. 하나는 실용적 질문—AI를 잘 다루기 위한, 정확하고 구조적인 프롬프트. 또 하나는 본질적 질문—이 기술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전자는 훈련으로 배울 수 있다. 후자는 삶으로 단련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면서도 묻기를 멈추지 않았던 건, 질문이 곧 살아있음의 증거였기 때문일 것이다. AI가 세상의 모든 답을 외우는 동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아직 답이 없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