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인들은 길 잃은 나그네나 낯선 이방인을 정성껏 대접하는 관습을 '크세니아(Xenia)'라 부르며 신성시했다. 신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불쑥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경외심에서 비롯된 이 환대의 문화는, 척박한 고대 세계를 지탱하던 가장 따뜻한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낯선 존재를 기꺼이 내 공간에 들여놓는 너그러움이야말로 인류가 야만의 시대를 건너 문명으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도심의 세련된 공간들은 이 오래된 지혜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출입을 막는 '노키즈존'으로 시작된 배제의 성벽은 이제 노년층을 거부하는 '노시니어존', 개인 공부나 노트북 사용을 제한하는 '노스터디존'으로 그 영역을 무한히 확장해 가고 있다. 공간이 사람을 품는 대신, 사람을 감별하고 걸러내는 체가 된 형국이다.

최근 발표된 통계는 이러한 배제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여론조사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2025년 2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68%가 '노키즈존을 허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더욱 주목할 점은 특정 행위를 제한하는 '노스터디존'에 대해서도 과반이 넘는 59%가 찬성 의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존재나 특정 행동을 내 시야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열망이 이제는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자 대중적 합의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배제를 선택한 이들의 사정을 전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값비싼 임대료를 감당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자영업자에게는 매장의 회전율과 분위기가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거나 업무를 보기 위해 비용을 지불한 소비자 역시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무례한 행동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현대인의 피로감 섞인 호소에는 분명 귀를 기울여야 할 현실적 이유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리를 위해 타인을 지워버리는 방식의 해결책은 손쉬운 만큼 치명적이다. 배제는 언제나 또 다른 배제를 낳는 전염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아이를 막아선 벽은 이내 노인을 막아서고, 공부하는 이를 밀어낸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특성을 불편해하며 밀어내기 마련이다.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를 공간에서 완전히 소거하는 방식에 길들여질 때, 우리는 결국 나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고립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학자들은 공적 공간의 쇠퇴가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진다고 경고해 왔다. 서로 다른 세대와 계층이 한 공간에 머물며 부딪치고, 갈등하고, 끝내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면역력을 키우는 교실이다. 무균실처럼 고요하고 깨끗한 공간만을 고집할 때, 우리의 공존 능력은 퇴화할 수밖에 없다. '나와 다른 이'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사회는 작은 갈등 앞에서도 쉽게 균열이 가고 만다.

우리가 쳐놓은 수많은 '노(No)'의 장벽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외로움과 단절뿐이다. 이제는 배제의 경계선을 지우고, 서로의 서투름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온기 있는 공간을 고민해야 할 때다. 닫힌 문 뒤에서 누리는 고요함보다, 열린 문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며 서로의 존재를 견뎌내는 힘이 우리를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해 열어둔 작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햇살만이, 차갑게 얼어붙은 공동체의 광장을 다시 녹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