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사랑방은 손님을 환대하는 공간이되, 안채라는 사적 공간을 보호하는 절묘한 완충지대였다. 주인이 허락한 경계를 넘지 않는 것, 그것이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던 이 땅의 오랜 묵계(默契)였다. 그러나 오늘날 서울의 유서 깊은 북촌 한옥마을에서 이 아름다운 경계는 허물어진 지 오래다. 2023년 기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주민은 고작 6,100여 명에 불과하지만, 한 해 이곳을 찾는 발길은 무려 664만 명에 달한다. 주민 수의 1,100배가 넘는 외지인이 매일 골목을 메우는 풍경은 환대를 넘어선 침범이자, 삶의 터전을 흔드는 거대한 해일이다.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들려오는 캐리어 바퀴 소리, 한옥 담장 너머로 불쑥 들이밀어지는 카메라 렌즈는 주민들에게 일상이 아닌 생존의 위협이다. 골목길은 활기를 잃고 전시장으로 변했으며, 주민들은 제 집 안에서도 발소리를 죽여야 하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혔다. 정취를 찾아온 이들이 정작 그 정취의 뿌리인 주민들의 일상을 갉아먹는 이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일각에서는 관광객의 유입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촉매제라고 항변한다.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이들은 '관광지 주민으로서 감수해야 할 기회비용'이라며 상생의 책임을 주민에게 전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는 박제된 공간에 무슨 생명력이 있겠는가. 주민이 떠난 북촌은 결국 영혼 없는 민속촌이자, 일회성 소비재로 전락할 뿐이다. 관광 수익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정작 소음과 쓰레기 감당에 지친 주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관광(觀光)이라는 한자의 본뜻은 '나라의 빛을 본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멀 지경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나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관광객 제한 조치를 도입한 것은 그들이 폐쇄적이어서가 아니다.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다. 우리 역시 북촌의 비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지속 가능한 관광 생태계를 위해서는 이제 '양적 팽창'에서 '질적 공존'으로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
상생의 해법은 멀리 있지 않다. 주민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시간제 통행 제한이나 예약제의 전면적 도입, 그리고 관광 수익의 일부를 주민 복지와 지역 환경 개선에 직접 환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손님에게 안방을 내어주느라 정작 주인이 길바닥으로 나앉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비극은 이제 멈춰야 한다.
한옥의 처마는 비바람을 막아주면서도 햇살을 품어 안는 상생의 건축이다. 이제 우리의 관광 정책도 이 처마를 닮아야 한다. 바람은 머물지 않기에 아름답고, 집은 사람이 살기에 따뜻한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