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소 앞에 줄을 섰다가 빈손으로 돌아섰다. 투표용지가 떨어졌다는 안내원의 말에 유권자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선거 당일,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가 행정 착오로 무너진 것이다.
이 사태를 두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담화문에서 「결과에 영향이 없으면 괜찮다는 식의 안일한 행정 편의주의」라고 직격했다. 결과론적으로 당락이 바뀌지 않았다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시민 한 명 한 명의 참정권이 침해된 것 자체가 헌법적 사안이다. 선거 관리의 실패는 숫자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투표용지 부족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사전투표 참여율 상승, 유동 인구 분포 변화 등 예측 가능한 변수들이 있었음에도 수요 예측에 실패했다면, 이는 시스템 부재가 아니라 시스템을 운용하는 태도의 문제다. 역대 선거 데이터를 축적해 온 기관이 투표 수요를 과소 추정했다는 것은 구조적 타성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선관위 스스로 그 근거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사후 대응이다. 현장에서 혼선이 빚어지는 동안 신속한 추가 배분이 이뤄지지 않았고, 유권자에게 돌아온 것은 뒤늦은 해명뿐이었다. 선거는 단 하루, 투표 시간은 정해져 있다. '나중에 보완하면 된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행정이 바로 선거 관리다. 이 불가역성을 모른다면 선거 관리 기관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 효력을 다투는 소청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선거 결과를 법적으로 다투는 상황 자체가 행정 실패가 낳은 후폭풍이다. 소청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선거 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이미 손상됐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뢰는 한 번 깨지면 판결문 한 장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본지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세 가지를 촉구한다. 첫째,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경위와 의사결정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라. 내부 감사에 그치지 말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 조사단을 구성해야 한다. 둘째, 투표 수요 예측 모델을 전면 재검토하고 결과를 공표하라. 셋째, 현장 이상 상황 발생 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비상 프로토콜을 제도화하라.
선거는 4년 혹은 5년마다 오지 않는다. 크고 작은 선거가 매해 이어진다. 이번 실패를 '예외적 사고'로 처리하고 넘어가는 순간, 다음 선거도 같은 위험을 안고 치러지게 된다. 투표소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유권자들에게 선관위가 빚진 것은 사과문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제도적 보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