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스스로 눈도 뜨지 못하면서 튜브와 기계에 의존해 수개월을 버티는 것, 그것이 과연 '삶'인가. 가족들은 그 옆에서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철학 강의실의 가설이 아니다. 2025년,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매년 수십만 명이 삶의 마지막 문턱에 선다. 제도는 아직 그 문 앞에 서 있지 않다.
올해 5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89%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삶의 일부」라고 답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명제다. 그런데 정작 그 준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논의는 숫자에 한참 못 미친다.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은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법제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멈추는 것'을 허용했을 뿐이다.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법의 바깥에 있다.
존엄사와 웰다잉 입법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이 간극 때문이다. 연명의료 중단은 치료를 끊는 소극적 행위다. 반면 의사 조력 사망(Physician-Assisted Death)은 환자의 명시적 요청에 따라 의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다. 두 개념은 윤리적으로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그 차이를 뭉뚱그린 채 '존엄사 합법화'를 외치면 논의가 흐릿해진다. 먼저 개념을 정확히 나눠야 한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벨기에, 캐나다, 스페인이 뒤를 따랐다. 캐나다의 경우 2016년 도입 후 해마다 대상 요건을 확대하면서 지금은 말기 신체 질환을 넘어 정신 질환 환자에 대한 적용 여부까지 논의 중이다. 이 사례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입법은 가능하다. 그리고 입법 이후가 더 어렵다.
한국 사회가 이 논의를 회피해온 데는 이유가 있다. 종교계의 반발, 의료계의 윤리적 부담, 노인·장애인 단체의 '죽음 압력' 우려가 얽혀 있다. 특히 경제적 이유로 가족이 노인의 죽음을 유도할 수 있다는 공포는 근거 없는 기우가 아니다. 장기 요양 비용이 가계를 무너뜨리는 현실에서 「존엄한 선택」이 「경제적 선택」으로 둔갑할 가능성은 법이 세밀하게 막아야 할 구멍이다.
그렇다고 논의 자체를 멈출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다. 초고령사회 진입 원년, 국민 10명 중 9명이 죽음 준비를 삶의 일부로 인식하는 이 시점에 사회적 숙의를 시작하지 않으면, 5년 뒤 10년 뒤 우리는 준비 없이 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다.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시민사회가 한 테이블에 앉아 「어떤 조건에서, 누가, 어떤 절차로」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지는 아직 많은 이들에게 선택지가 없다. 법이 삶의 시작을 보호하듯, 삶의 끝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더 이상 급진적이지 않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 보호의 모양을 합의할 용기가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