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스당 3,300달러. 2025년 금 현물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찍은 숫자다. 10년 전만 해도 1,100달러 수준이었다. 세 배가 됐다. 그런데 이 상승은 단순한 인플레이션 헤지나 경기 침체 우려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 자산을 줄이고 금을 쌓아가는 구조적 움직임—이른바 '지정학적 금 매입'이 가격을 밀어 올린 핵심 엔진으로 분석된다.

세계금위원회(WGC)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이후 전 세계 중앙은행의 금 순매입량은 연간 1,000톤을 꾸준히 상회하고 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유례없는 수준이다. 중국인민은행, 폴란드 국립은행, 인도 준비은행 등이 대표적인 매입 주체로 꼽힌다.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달러 자산을 서방에 동결당한 사건이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외환보유액을 달러로 쌓는 것이 더 이상 '안전'이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이 신흥국과 비서방 국가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달러 무기화가 금 수요를 만들었다

미국이 달러를 지정학적 도구로 활용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 외환보유액 동결은 규모와 파급력에서 이전과 달랐다. 약 3,000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이 사실상 하룻밤 사이에 접근 불능 상태가 됐다. 이 장면을 지켜본 중국, 중동 산유국, 동남아 중앙은행들은 조용히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금은 어떤 국가의 관할권도 받지 않는다. 제재할 수도, 동결할 수도 없다. 이 단순한 속성이 지금의 금 수요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다.

미중 갈등의 심화는 이 흐름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중국은 2015년 이후 달러 표시 미국 국채 보유량을 지속적으로 줄여왔고, 같은 기간 금 보유량은 늘려왔다. 위안화 국제화 전략과도 맞물린다. 금 보유는 기축통화를 향한 신뢰의 담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유국들 사이에서 원유를 달러 대신 위안화로 결제하는 '페트로위안' 거래가 조금씩 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의 흐름이다.

한국의 금 보유, 세계 순위는 제자리걸음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은 104.4톤으로, 세계금위원회 집계 기준 30위권 수준에 머물고 있다. 외환보유액 대비 금 비중은 1~2% 안팎으로, 독일(약 70%), 이탈리아(약 65%), 미국(약 77%) 등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다. 신흥국과 견줘도 낮은 편이다. 폴란드는 최근 수년간 금 매입을 공격적으로 늘려 보유량을 400톤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지정학적 불안을 명시적 이유로 들었다.

한국은행이 금 보유를 소극적으로 유지해온 데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금은 이자를 낳지 않는다. 유동성도 국채에 비해 떨어진다. 그러나 지정학적 리스크가 외환보유액 운용의 핵심 변수로 떠오른 지금, 이 논리의 설득력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금융계 일각에서 나온다. 달러 패권의 절대성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전제가 깔리면, 포트폴리오의 균형추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논리다.

금의 미래: 헤지 자산에서 준비통화 경쟁의 도구로

앞으로 금의 역할은 단순한 안전자산의 범주를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탈달러화 논의가 구체화될수록, 어떤 국가가 더 많은 금을 보유하느냐는 통화 신뢰의 기반을 결정하는 문제가 된다.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뜻하는 게 아니다. 달러 중심 질서가 다극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금은 새로운 통화 질서의 중립적 기준점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물론 금 가격 자체는 변동성이 크다. 달러 강세, 미국 금리 인상, 지정학 긴장 완화 시 가격이 급락한 선례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중앙은행 매입은 가격 등락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구조적 수요라는 점에서 이전 사이클과 다르다. 수익을 노린 투기가 아니라,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헤지다.

달러가 무기가 되는 세계에서, 금은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자산이다. 그것이 지금 각국 중앙은행이 묵묵히 금고를 채우는 이유다. 한국이 이 흐름 밖에서 얼마나 더 오래 있을 수 있는지, 그 선택은 결국 우리 외환 전략의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