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썼다. 「책임의 원칙」에서 그는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를 역설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미처 예견하지 못한 질문이 반세기 뒤 한국 사회를 덮쳤다. 과거 세대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 지하철 한 칸에서 노인 무임승차 스티커를 붙인 노인 옆에 헬멧을 들고 선 20대 배달 라이더가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피곤하다. 그러나 피곤함의 출처가 다르다. 이 장면이야말로 오늘 한국 복지 논쟁의 본질이다.
대구시는 2023년 조례 개정을 통해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매년 1세씩 단계적으로 올리기로 했다. 2024년을 기점으로 그 조정이 시작됐다. 작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상징은 크다. 65세라는 기준선이 처음 흔들린 것이다. 그 선은 1980년대 고령화율이 4%대이던 시절 그어진 것이다. 지금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이미 20%에 육박한다. 선이 그대로인데 세상이 바뀐 셈이다.
반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에 머문다. 국민연금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베이비붐 세대가 노년에 진입했고, 상당수는 노후 소득 없이 70대 이후를 버티고 있다. 이들에게 무임승차 연령 상향은 단순한 교통 요금 문제가 아니다. 이동권의 박탈이자 존엄의 문제다. 이 점을 외면한 채 수치만으로 연령 기준을 밀어 올리는 것은 잔인한 행정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반론을 인정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문제는 나이 자체가 아니라, 나이를 복지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구조다. 65세라는 숫자는 필요의 증거가 아니다. 65세 자산가와 65세 독거 노인은 같은 번호판을 달고 있지만 전혀 다른 현실 위에 서 있다. 나이는 복지의 입구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복지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연령주의(ageism)의 역설'이라 부른다. 노인을 차별에서 보호하려는 제도가 오히려 노인을 단일한 집단으로 범주화함으로써, 내부의 불평등을 지운다. 70세의 전직 대기업 임원과 70세의 독거 기초생활수급자를 같은 칸에 앉히는 것이 과연 형평인가. 나이라는 척도 하나로 복지를 재단하는 순간, 우리는 진짜 취약함을 놓치게 된다.
세대 갈등이라는 프레임도 위험하다. 청년이 노인 복지에 분노하고 노인이 청년 지원에 눈살을 찌푸리는 구조는, 결국 복지 총량을 늘리기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교착으로 귀결된다. 두 세대가 같은 파이를 두고 싸우는 동안, 그 파이의 크기를 결정하는 구조적 질문은 뒤로 밀린다. 노동 시장, 조세 체계, 연금 개혁. 이 세 가지를 건드리지 않으면 연령 기준 1세 조정은 소음일 뿐이다.
초고령사회는 단순히 노인이 많아지는 사회가 아니다. 노화의 속도와 내용이 달라지는 사회다. 75세에도 현역으로 일하는 사람이 늘고, 55세에 이미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는 사람도 있다. 복지의 경계를 나이로 긋는 것은, 지도에 직선을 그어 국경을 만든 제국주의적 발상과 닮았다. 현실의 지형은 직선이 아니다.
나이는 인생이 쌓인 무게다. 그 무게를 사회가 함께 지는 것은 문명의 의무다. 다만, 무게를 재는 저울이 낡았다면 저울부터 고쳐야 한다. 숫자 하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를 다시 묻는 일. 그것이 지금 이 사회가 피해 온 진짜 질문이다.
노을이 지는 시각은 모두에게 같다. 그러나 그 노을 아래 누가 따뜻하고 누가 춥느냐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선택했는지의 결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