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소득이 있는 곳에 매긴다. 이건 원칙이 아니라 상식이다. 그런데 가상자산만큼은 이 상식이 번번이 비켜간다. 2022년, 2023년, 2025년. 과세 시행일이 세 번 미뤄졌고, 이제 2027년을 바라보는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쯤 되면 '유예'가 아니라 '포기'에 가까운 것 아니냐는 물음이 나올 법하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고객확인(KYC)을 마친 국내 가상자산 이용자는 1,077만 명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2026년이면 1,3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한다. 유권자 다섯 명 중 하나가 가상자산 계좌를 보유한 셈이다. 과세 유예 논의가 매번 선거 주기와 묘하게 맞물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1,300만 표심은 어떤 정책 논리보다 강력한 인력을 발휘한다.
과세 유예를 지지하는 측의 논리는 간명하다. 투자자 보호 인프라가 먼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에는 공시 의무, 불공정거래 제재, 예탁결제 시스템이 있다. 가상자산 시장에는 아직 이에 상응하는 안전망이 촘촘하지 않다. 과세는 하되 보호는 없다면, 세금만 걷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로 읽힌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맥락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함정이 있다. 인프라가 완성된 뒤 과세하겠다는 발상은, 인프라 정비를 서두를 유인을 스스로 지운다. 세금이 걷히기 시작해야 제도 정비에 예산과 정치적 동력이 붙는다. 주식 양도소득세도 제도가 완벽해진 뒤에 도입된 것이 아니었다. 과세와 제도 정비는 순차가 아니라 병행이 맞다.
정작 더 따져봐야 할 것은 '투자자 보호'라는 명분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질문이다. 고수익을 올린 투자자가 세금 없이 수익을 확정하는 구조가 지속되는 동안, 손실을 입은 소액 투자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예가 길어질수록 이득을 보는 쪽은 시장에서 이미 수익을 거둔 집단이다. '보호'라는 언어가 실제로는 과세 회피를 가리는 수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과세 체계 자체의 정교함은 필요하다. 손익 통산 범위, 이월공제 기간, 거래소 간 데이터 연계 등 기술적 과제는 실재한다. 이 부분은 유예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시행을 미루는 방식으로는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세법은 쓰면서 고치는 것이지, 쓰기 전에 완성되는 법이 없다.
1,077만 명이 참여하는 시장에 세금이 없다는 것은, 그 시장이 아직 '진지한 경제 영역'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과세야말로 가상자산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표심을 의식한 유예가 반복될수록, 시장도 투자자도 제도의 바깥에 계속 머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