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서울 마포구의 한 중소기업 회의실. 흰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긴 68세 남성이 스크린 앞에 섰다. 그는 30년간 대기업 품질관리 부서를 이끌었던 전직 임원이다. 이날 그가 컨설팅하는 곳은 불량률을 낮추지 못해 납품 계약이 위태로워진 20인 규모의 제조업체. 두 시간의 현장 점검과 공정 분석 끝에 그는 문제의 핵심 공정 두 곳을 짚어냈다. 이 기업이 그에게 지불하는 월 계약금은 150만 원. 정부 보조금 없이 시장이 직접 값을 매긴 숫자다.

이런 장면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아직 '실버 일자리'를 공원 청소나 주차 안내 정도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2025년 전체 인구의 31.6%에 육박하며, 불과 십 년 전과 비교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숫자가 이 정도면 사회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 거대한 인력을 저임금 단순직에 묶어둘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평생 쌓아온 지식을 다시 회로에 연결할 것인가.

경력이 곧 상품이 되는 구조, 조금씩 현실이 되다

보건복지부는 2026년 시행을 목표로 '노인역량활용 선도모델 우수사업'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단순 일자리 숫자를 늘리는 데서 벗어나, 고령층의 전문 경력을 실제 시장 수요와 연결하는 모델을 발굴하겠다는 취지다. 대상은 퇴직 교사의 학습 멘토링, 전직 의료인의 건강관리 코디네이터, 이공계 출신 시니어 엔지니어의 기술 자문 등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

민간에서는 이미 움직임이 앞서 있다. 일부 시니어 전문 인력 플랫폼은 70대 전직 회계사와 세무사를 영세 자영업자와 연결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중견기업들 사이에서는 퇴직 연구인력을 프로젝트 단위로 재고용하는 관행이 제조업과 바이오 분야를 중심으로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구조의 핵심은 '고용'이 아니라 '협업'이다. 기업은 정규직 부담 없이 숙련 지식을 가져오고, 시니어는 강도 높은 전일제 근무 없이 전문성을 팔 수 있다.

일본이 먼저 겪은 길, 한국이 배울 것

일본은 이 문제를 한국보다 10년 앞서 통과했다. 2013년 '고령자고용안정법' 개정으로 65세까지 고용을 의무화한 데 이어, 2021년에는 70세까지 취업 기회를 확보하도록 기업 노력 의무를 신설했다. 그 결과 일본의 65세 이상 취업자 수는 900만 명을 넘었고, 이 중 전문·기술직 비중이 꾸준히 오르는 추세다. 단순히 일자리 수를 늘린 게 아니라, 직무 재설계와 시간 유연화를 동시에 추진한 결과다.

한국의 현 구조는 여기에 비해 아직 갈 길이 멀다. 공공 노인 일자리 사업의 상당 부분이 월 30시간 미만, 27만~30만 원 수준의 활동비형에 집중돼 있다. 이 구조는 참여자의 소득 보완에는 기여하지만, 경력 활용이나 사회적 생산성과는 거리가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공공 일자리 예산의 일부를 전문 경력 매칭 인프라에 투입하면 단위 효과가 훨씬 크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제도보다 먼저 바뀌어야 할 것

구조 전환을 가로막는 벽은 제도만이 아니다. 고령 인력을 채용하는 기업 쪽의 인식이 여전히 걸림돌로 지목된다. 「나이 든 사람은 새 기술을 못 따라온다」는 선입견이 면접 단계에서 걸러내는 관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는 디지털 리터러시를 갖춘 60대가 빠르게 늘고 있고, 특정 직무에서는 경험치가 학습 속도의 격차를 충분히 메운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니어 당사자들의 준비 역시 과제다. 경력을 '팔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는 것, 즉 프로젝트 단위의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협업 플랫폼을 활용하는 역량은 자연스럽게 갖춰지지 않는다. 지자체와 시니어 지원 기관이 단순 취업 알선을 넘어 '경력 재포장'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다.

공원에서 쓰레기를 줍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됐을 때다. 30년간 현장을 누빈 사람의 판단력은, 어떤 채용공고에도 값을 제대로 못 매기는 자산이다. 그 자산이 만료 기한이 지난 것처럼 쌓여가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 손해를 보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