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장의 장기 부진 속에서 국내 배터리 업계가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으로 전략을 크게 선회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배터리 3사는 정부와 업계의 주도로 확대되는 ESS 시장을 새로운 수익 모델로 삼고 생산 거점을 적극 늘려 대응하고 있다.

미국 ESS 시장의 가파른 성장이 이러한 전략 전환을 촉발했다. 시장조사업체 모르도르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미국의 ESS 신규 설치 규모는 올해 약 49.5GW에서 2030년 131.75GW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급증과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ESS 시장 성장을 견인하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태양광·풍력 발전 비중이 높아질수록 간헐적 발전을 보완할 저장설비의 필요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국내 배터리 3사는 미국 현지에 생산 역량을 대폭 확충할 계획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시간 공장의 일부 전기차용 생산능력을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중심으로 전환 중이며, SK온은 조지아 공장을 중심으로 ESS 사업 확대를 검토 중이다. 2028년까지 글로벌 생산능력 500GWh 이상 확보(LG에너지솔루션), 2026년 이후 연간 200GWh 이상 생산체계 구축(SK온), 2027~2028년 100GWh 이상 확보(삼성SDI) 등이 각사의 목표다.

국내 ESS 수요도 정부 주도로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29년까지 중앙계약시장을 통해 2.22GW 규모의 ESS를 구축하고, 2030년까지 배전망에 485㎿ 규모를 설치할 예정이다. 또한 2030년까지 2500~3000개가 조성될 것으로 보이는 햇빛소득마을에도 ESS를 활용해 망 안정성을 보완할 계획이다. ESS는 전기차 배터리보다 인증 부담이 적고 장기 공급 계약 비중이 높아 수익성 확보에 유리하다는 평가다.

다만 정부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래에너지융합학과 유승훈 교수는 「현재의 정책 수단들은 가격 신호나 전력망의 근본적 개선보다는 재정 보조와 인위적 장기 계약 시장을 통해 수급을 맞추는 미봉책에 가깝다」며 「저가 입찰에 따른 도덕적 해이가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