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주 한 대형 슈퍼마켓 냉동식품 코너. 만두 제품 옆 안내판에는 영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Inspired by Korean Tradition.」 생산지는 미국 캘리포니아다. 한국산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제품을 만든 곳은 CJ제일제당이다. 한국 브랜드가, 미국 땅에서, 미국 소비자 입맛에 맞춰 만든다. 이것이 지금 K-푸드가 선택한 방향이다.
K-푸드의 팽창은 숫자로도 읽힌다. 농림축산식품부 집계 기준으로 국내 식품 수출액은 수년간 꾸준히 우상향해 왔고, 김치·라면·떡볶이·만두를 필두로 한 품목들이 유럽·북미·동남아시아 유통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업계가 더 주목하는 숫자는 수출액이 아니다. 현지 공장 가동률과 현지 법인 매출이다.
수출에서 현지 생산으로 — 전략의 축이 바뀌었다
CJ제일제당은 미국·유럽·아시아에 걸쳐 현지 생산 거점을 운영 중이다. 단순히 물건을 배에 싣는 방식에서 벗어나, 현지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해 레시피를 조정하고 현지 원재료를 조달해 생산하는 구조다. 관세 장벽과 물류비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냉동 수입품'이라는 이미지를 걷어내는 효과도 노린다. 한국 음식이 에스닉 푸드 코너에서 일반 냉동식품 주류 선반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 이게 전략의 핵심이다.
김치 시장도 같은 흐름이다. 대상의 종가 김치는 2025년 수출액이 약 9,000만 달러에 달하며 국내 전체 김치 수출의 55%가량을 차지했다. 이 수치는 단일 브랜드로서 이례적인 집중도다. 종가는 현지 유통망 침투를 위해 발효 강도와 염도를 시장별로 달리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유럽 소비자에게는 덜 맵게, 동남아시아에는 현지 향신료와 조화시키는 식이다. '정통 김치를 수출한다'는 발상을 넘어, '현지인이 먹을 수 있는 김치를 만든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맞춤형 레시피 — 정체성과 현지화 사이의 줄타기
현지화 전략에는 딜레마가 있다. 너무 바꾸면 K-푸드가 아니게 되고, 안 바꾸면 팔리지 않는다. 업계는 이를 「코어-어댑트(Core-Adapt)」 방식으로 풀어낸다. 핵심 정체성(발효, 감칠맛, 매운맛의 구조)은 유지하되, 맵기·짠맛·식감은 시장에 맞게 조율하는 것이다. 농심이 미국 시장에 내놓은 신라면의 스코빌 수치는 한국 내 제품과 다르다. 오뚜기의 일부 해외용 소스 제품도 현지 식재료 기준에 맞춰 성분을 조정했다.
이 전략은 단기 수익보다 브랜드 자산 구축에 방점을 찍는다. 지금 당장 타협해서라도 선반에 오르는 것이 목표다. 일단 현지 소비자의 식습관 안으로 들어가면, 브랜드 충성도는 뒤따라온다는 계산이다. 실제로 K-드라마·K-팝이 문화적 친숙함을 깔아준 시장일수록 K-푸드 침투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업계 공통 분석이다.
다음 전선 — 할랄·비건·프리미엄 시장
1차 영토 확장이 라면·김치·만두 중심의 대중 시장이었다면, 2차 전선은 할랄 인증 제품과 비건·플랜트베이스드 시장이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중동 시장을 겨냥해 할랄 인증을 취득한 국내 식품기업 수는 최근 수년 사이 빠르게 늘었다. 풀무원은 두부 기반 제품으로 미국 비건 시장을 정면 공략하고 있고, CJ제일제당도 식물성 만두 라인업을 확대했다.
프리미엄 전략도 가시화되고 있다. 간편식 시장에서 '저렴한 이국 음식'으로 분류되던 K-푸드가, 건강·발효·자연재료를 앞세워 프리미엄 포지셔닝을 시도한다. 유럽 유기농 마켓에서 한국산 된장과 고추장이 '아시안 슈퍼푸드'로 판매되는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물론 리스크도 선명하다. 현지 생산 투자는 고정비 부담이 크고, 각국의 위생·성분 규제는 촘촘하다. 트럼프 행정부발 관세 정책 변화처럼 예측 불가능한 통상 환경도 변수다. 하지만 이미 현지 땅에 공장을 세운 기업에게 수입 관세는 남의 이야기다. 그것이 현지 생산 전략의 또 다른 묘수다.
K-푸드가 '한국 것을 파는 것'에서 '세계 어디서나 만들어 파는 것'으로 바뀌는 중이다. 영토는 이미 넓어졌다. 이제 문제는 그 땅에서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느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