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머리맡에 여권과 비상금을 챙겨두고 잠자리에 드는 일상. 이란 테헤란의 한 상사 주재원 김 모 씨(42)는 최근 한 달 동안 깊은 잠을 자본 적이 없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스마트폰의 긴급 재난 알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신경을 자극한다. 김 씨는 "언제든 짐을 싸서 공항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차 트렁크에 비상용 가방을 상시 적재해 두고 있다"며 현지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전했다. 중동 정세의 불확실성이 극에 달하면서, 현지에 체류 중인 우리 교민과 근로자들의 하루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고 불안하다.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현지 우리 국민의 안전 확보는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전면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정부와 현지 공관은 교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하고 있으나 현장의 긴장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단순한 우려를 넘어 실제 생존과 직결된 대피 계획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다각적인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급변하는 정세 속 급감하는 교민 수
사태의 심각성은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정부 관계 당국에 따르면, 중동 지역에 체류하는 우리 국민 수는 전쟁 초기였던 2026년 3월 초 약 2만 1,000명에 달했으나, 불과 3주 뒤인 3월 23일 기준 약 1만 3,000명으로 급감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약 8,000명의 교민과 근로자가 현지를 빠져나간 것이다. 이는 현지 상황이 일시적인 긴장 상태를 넘어 장기적이고 실존적인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현재 남아있는 1만 3,000여 명의 체류자들은 대부분 현지 생업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자영업자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건설사 필수 인력, 그리고 현지인과 가정을 꾸린 장기 거주자들이다. 이들은 철수하고 싶어도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잔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사정에 놓여 있다. 테헤란에서 개인 사업을 운영하는 한 교민은 "수십 년간 일궈온 터전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떠나기는 쉽지 않다"면서도 "상황이 더 악화되면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피난길에 올라야 할 것 같아 매일 피가 마르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정부와 기업의 '컨틴전시 플랜' 작동 실태
정부와 외교 당국은 현지 공관을 중심으로 24시간 비상 대책반을 가동하며 교민 안전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란을 비롯한 인근 위험 국가 체류 교민들에게 주기적으로 안전 공지를 발송하고, 비상 연락망을 최신화하는 작업이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다. 특히 유사시 제3국으로의 육로 대피 경로를 확보하고, 전세기 투입 등 다각적인 '컨틴전시 플랜(비상 대책)'을 수립해 둔 상태다.
현지에 진출한 우리 대기업들도 자체적인 안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대형 건설사와 상사들은 현지 주재원들의 가족을 우선적으로 귀국시키거나 인근 안전 지역으로 일시 대피시켰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현장 근로자들의 안전을 위해 매일 아침 비상 대피 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인근 국가로의 이동 경로와 차량을 상시 대기시켜 두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민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정부 차원의 조직적이고 신속한 군수 수송기 지원 등 공조 체계가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상시화된 지정학적 리스크, 근본적 안전망 구축 시급
전문가들은 중동 지역의 긴장 국면이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라고 분석한다. 따라서 일회성 대피 지원을 넘어, 상시화된 위기관리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외교 전문가들은 "정부와 민간 기업, 그리고 현지 한인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3각 공조 체계를 상설화해야 한다"며 "위기 단계별 행동 지침을 구체화하고 실전 같은 모의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실제 상황에서 혼선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화약고 위에 선 중동 교민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안심의 메시지가 아닌, 위기 발생 시 즉각 작동할 수 있는 신뢰성 높은 안전판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국익을 위해 땀 흘리는 우리 국민들이 더 이상 불안한 하루를 보내지 않도록, 정부와 사회 전체의 정교하고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