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말, 국민연금 적립금이 1,610조 원을 넘어섰다. 사상 처음으로 1,600조 원 고지를 밟은 수치다. 언뜻 든든해 보인다. 그러나 이 숫자가 오히려 위험하다. 압도적 규모가 주는 안도감이 정작 필요한 논의를 지연시키는 마취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국민연금 개혁 논의에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 이른바 '모수개혁'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을 본지는 우려한다. 보험료를 조금 더 내고 연금을 조금 덜 받는 방식의 조정은 기금 소진 시점을 몇 년 늦추는 데 그칠 뿐, 구조적 균열 자체를 메우지는 못한다. 10년짜리 처방전을 들고 30년짜리 병을 고치려는 셈이다.

구조개혁이 시급한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인구 구조의 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궤도에 들어섰다. 합계출산율이 0점대로 내려앉은 지금, 현행 세대 간 부양 방식의 연금 체계는 수지 균형점 자체가 흔들린다. 보험료를 올리더라도 보험료를 낼 미래 세대의 숫자 자체가 줄어든다. 납부자 기반이 쪼그라드는 구조에서 보험료율 인상만으로 기금 고갈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산술적 낙관론에 불과하다.

둘째, 기금 운용 방식과 수익 구조에 대한 근본적 재설계가 병행되지 않으면 적립금 규모는 오히려 왜곡된 신호를 줄 수 있다. 1,600조 원이라는 숫자는 현재 시장 상황과 운용 수익률에 크게 의존한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적립금 규모의 일시적 팽창을 구조적 건전성의 증거로 읽는 것은 위험한 오독이다. 기금이 언제, 얼마의 속도로 소진되는가에 대한 복수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국민이 실제 위험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개혁의 골든타임은 생각보다 짧다. 연금 개혁의 효과는 수십 년 뒤에야 재정으로 나타나지만, 정치적 결단은 지금 이 시기에만 가능하다. 세대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구조에서, 수급자가 많아질수록 개혁에 저항하는 유권자 집단의 규모는 커진다. 스웨덴과 독일이 재정 위기 전에 명목확정기여 방식이나 자동안정화 장치를 도입한 것은 '아직 여유가 있을 때' 움직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그 시점에 서 있다.

모수개혁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수개혁을 완료했다는 이유로 구조개혁 논의를 다음 정권으로 넘기는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 개혁의 부담은 가장 많이 내고 가장 적게 받는 세대에게 집중될 것이다. 지금 국회와 정부가 합의해야 할 것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어떤 연금 체계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1,600조 원이라는 숫자가 방패가 아닌 시계로 읽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