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 7.5. 카라카스의 건물들이 무너지던 순간, 지구 반대편 한국의 외교부 긴급 상황실에도 불이 켜졌다. 현지 한인 125명의 안전을 확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몇 시간.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천 명이 사망할지 모른다는 예보 앞에서, 우리는 어디까지를 '우리가 도울 사람'으로 여기는가.

이 질문이 불편하다면, 그게 정상이다. 재난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불편한 물음을 던진다. 국적이 다르면 슬픔의 무게도 달라지는가. 뉴스에 더 많이 나오는 재난이 더 많은 도움을 받는 게 맞는가. 우리는 지리적 거리가 아니라 미디어의 조명 범위에 따라 연민을 배분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 정부는 2025년 인도적 지원 예산으로 6,775억 원을 편성했다. 2023년의 2,993억 원과 비교하면 2년 만에 2.2배 넘게 늘어난 수치다. 숫자는 인상적이다. 그러나 예산의 증가가 곧 철학의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돈을 더 많이 쓴다고 해서 누구를 왜 돕는가라는 질문에 자동으로 답이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도덕적 거리(moral distance)'라는 개념으로 다뤄왔다. 피터 싱어는 강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데 드는 비용과 아프리카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데 드는 비용이 같다면, 거리는 의무의 경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불편하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명제다. 지진으로 무너진 카라카스의 잔해 속에서 생존자를 찾는 손길이 어느 나라 사람의 것이냐는,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물론 국가의 대외 원조에는 외교적 계산이 깔려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건 순진함이다. 하지만 계산이 있다는 사실이, 현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생존자를 찾는 구호대원들의 행위까지 공리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구호 활동의 현장에는 예산 논리가 닿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단순해진다. 살아있는 사람을 꺼내야 한다는 것, 그것뿐이다.

재난 구호를 인문학적으로 고찰한다는 건, 결국 생명을 셈하는 방식을 반성하는 일이다. 우리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일어난 두 재난 중 어느 쪽에 더 오래 시선을 두는가. 그 선택이 쌓이면 어떤 세계가 만들어지는가. 인도주의적 원조 예산을 두 배로 늘리는 것보다, 어쩌면 이 질문을 두 배 더 오래 붙드는 것이 먼저일지 모른다.

무너진 건물은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생명은 애도받고 어떤 생명은 통계로만 기억되는 구조는, 콘크리트보다 훨씬 오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