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새만금 산업단지의 한 공터. 포클레인 몇 대가 흙을 퍼 올리고, 멀리 바람막이 펜스가 지평선을 가른다. 안내판에는 '첨단산업 용지'라고 적혔지만, 입주 예정 기업의 이름은 아직 빈칸이다. 호남과 충청권을 묶어 조성될 제2 반도체 클러스터는 정부 발표 자료 위에서는 이미 완성형이다. 현장은 아직 시작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6년 6월 25일 '반도체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핵심은 신규 클러스터 지정과 입주 기업 지원에서 비수도권을 우대하고, 정주 여건 개선을 명문화한 조항을 담는 것이다. 수도권 집중을 법령 차원에서 분산시키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선언이 구조를 바꾼 역사가 얼마나 되는가. 반도체 산업은 특히 그렇다. 설비·인력·공급망이 반경 수십 킬로미터 안에 모여 있어야 돌아가는 업종이다.

수도권 집적의 물리학, 법령이 거슬러야 할 것들

국내 반도체 제조·설계의 중심은 경기 남부 — 화성, 평택, 용인을 잇는 벨트다. 이 지역에 웨이퍼 공급사, 특수가스 업체, 장비 유지보수 인력, 반도체 설계 전문 인력이 층층이 쌓여 있다. 팹리스 스타트업이 서울 강남에 사무소를 열고, 협력사가 수원·이천에 공장을 두는 건 우연이 아니다. 거리가 곧 납기이고, 납기가 곧 수율이다. 지방에 팹을 세운다는 것은 이 생태계 밖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다.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 사례가 자주 비교 대상으로 오른다. TSMC 구마모토 공장은 일본 정부의 대규모 보조금과 소니·덴소 같은 앵커 기업의 동반 투자가 결합해 가능했다. 단순히 '지방에 공장을 짓겠다'고 해서 공급망이 따라온 게 아니라, 이미 그 지역 인근에 반도체 수요 산업이 있었다. 구마모토 주변에는 자동차·전장 부품 업체들이 집적해 있었다. 한국의 호남과 충청이 이 조건을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는 솔직한 질문이 필요하다.

인력과 정주 여건: 가장 조용한, 가장 어려운 숙제

반도체 공장 하나를 돌리는 데 필요한 공정 엔지니어, 설비 전문가, 품질 관리 인력은 수천 명 단위다. 지방 이전의 가장 큰 장벽은 사실 인건비나 토지가 아니다. '사람이 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배우자의 직장, 자녀 교육, 의료 접근성 — 이 세 가지가 엔지니어 한 명의 이주를 결정한다. 정부가 이번 시행령에 '정주 여건 개선' 조항을 넣은 것은 이 현실을 인식했다는 신호다. 하지만 조항과 실행 사이의 거리는 항상 예상보다 멀다.

충청권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세종·대전·청주 축은 이미 일정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수도권까지 고속철도로 1시간 안팎이다. 문제는 호남이다. 광주와 전북이 반도체 클러스터의 한 축을 맡는다면, 서울·경기 기반의 고급 인력을 끌어오기 위한 생활 인프라 투자가 산업 투자보다 먼저, 혹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공장을 먼저 짓고 학교와 병원은 나중에 짓는 순서는 이미 수도권 이전 사업에서 반복된 실패 패턴이다.

앵커 기업 없는 클러스터는 이름뿐

클러스터의 성패는 대형 앵커 기업이 결정한다.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주변에 협력사가 몰려든 것처럼, 지방 클러스터도 대기업 혹은 글로벌 팹리스·OSAT 기업의 유치가 선행돼야 중소 협력사의 이전이 뒤따른다. 비수도권 우대 조항이 설비투자 세액공제, 용지 조성 원가 차등 적용 등 실질적 비용 우위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기업들은 익숙한 수도권 생태계를 떠날 유인이 없다.

정부는 반도체 특별법 시행령을 통해 이 구조를 바꾸려 한다. 방향은 맞다. 그러나 지방 반도체 기지가 진짜 산업 거점이 되려면 법령 한 줄보다 더 많은 것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앵커 기업 유치, 공급망 재편, 정주 인프라 구축, 지역 대학의 반도체 학과 강화 — 이 네 가지 바퀴가 함께 돌지 않으면, 지도 위의 클러스터는 지도 위에만 머문다.

지방 균형 발전을 위한 반도체 정책은 타이밍이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진행 중인 지금이 창문이 열린 시간이다. 그 창문이 닫히기 전에, 선언을 실행으로 번역할 속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