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을 뛰었다. 무릎 수술만 세 번. 그가 마지막으로 경기장을 나서던 날, 관중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라커룸 문이 닫히는 순간, 그 소리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 뒤를 채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처음으로 어디에도 가야 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려한 커리어의 이면에는 이런 장면이 반복된다. 수십만 관중 앞에서 뛰던 선수가, 은퇴 후 이력서 한 장을 앞에 놓고 손을 떨게 되는 현실. 이것이 지금 한국 스포츠계가 직면한 민낯이다.
은퇴 후의 벽 — 숫자가 말하는 현실
관련 조사에 따르면, 은퇴 선수들이 재취업 과정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직업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는 응답이 약 3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직업·진로에 대한 정보 부족'이 약 27%, '경력 및 스펙 부족'이 약 18%를 차지했다. 세 항목을 합산하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취업 과정에서 구조적 장벽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수치가 단순한 개인의 어려움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초등학교 무렵부터 훈련에 전념한다. 학업은 뒤로 밀린다. 자격증도, 사회 경험도 쌓을 시간이 없다. 30대 초반에 은퇴하면 앞으로 4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손에 쥔 것은 메달과 기록뿐이다. 그 메달이 이력서의 빈칸을 채워주지는 않는다.
코치나 지도자 자리를 희망하는 경우도 많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국내 스포츠 지도자 자리는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적다. 은퇴 선수 전원이 지도자로 흡수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상당수는 스포츠와 무관한 분야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거기서 그들의 선수 경력은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시스템의 부재 — 지원은 있지만 연결이 없다
정부와 체육 단체가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을 통한 경력 전환 프로그램, 은퇴 선수 취업 지원 사업 등이 운영되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도 이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진 바 있다. 제도적 논의의 싹은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프로그램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선수들 상당수가 어떤 지원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은퇴를 맞는다. 정보는 파편화되어 있고, 접근 경로는 불투명하다. '직업·진로에 대한 정보 부족'이 두 번째로 높은 응답 항목이었다는 사실은, 지원 체계가 선수들에게 실질적으로 닿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해외 사례는 다르다. 일부 유럽 국가와 호주에서는 현역 선수 시절부터 '이중 경력(dual career)' 모델을 제도화하고 있다. 훈련 일정을 조정해 대학 교육을 병행하고, 금융·법·미디어 분야 인턴십을 제공한다. 은퇴는 갑작스러운 절벽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전환점이 된다. 선수 본인도 두 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경기장을 나선다.
전환의 열쇠 — 경험을 언어로 바꾸는 일
선수 생활이 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수십 년간 극한의 압박 속에서 단련된 집중력,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회복력, 팀 안에서 역할을 분담하고 조율하는 협업 능력. 기업이 신입 직원에게 요구하는 덕목과 놀랍도록 겹친다.
문제는 선수들이 그 경험을 노동시장의 언어로 번역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매일 6시간씩 훈련했다'는 사실이 이력서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팀 주장으로서 후배를 이끈 경험이 리더십 역량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국가와 체육 시스템의 책임이다. 단발성 취업 박람회가 아니라, 현역 재직 중부터 시작하는 장기 경력 설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은퇴를 앞둔 선수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기 전에, 먼저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 작업을 선수 혼자 떠맡게 두는 것, 그게 지금 이 사회가 그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