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법정에 소환된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디에 항의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버튼을 눌러도, 화면을 건드려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키오스크 앞에 선 노인의 표정이 그 장면과 겹쳐 보이는 건 지나친 비유일까.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국내 키오스크 보급 대수는 2021년 약 21만 대에서 2023년 53만여 대로 불과 2년 새 두 배 이상 불어났다. 패스트푸드점, 영화관, 병원, 주민센터, 심지어 동네 분식집까지.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화면이 들어섰다. 속도가 빠를수록 뒤처지는 이들이 생긴다는 자명한 사실은 어디선가 조용히 묻혔다.

기술 낙관론자들은 말한다. 키오스크는 인건비를 낮추고, 대기 시간을 줄이고, 주문 오류를 감소시킨다고. 틀린 말이 아니다. 효율의 관점에서 무인화는 설득력 있는 선택이다. 하지만 효율이 유일한 기준이 될 때, 사회는 느린 사람을 비용으로 본다. 그리고 그 '느린 사람' 중 다수는 일흔을 넘긴 이들이다.

고령층의 디지털 격차는 의지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시력이 흐려지고,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고, 화면 전환 속도를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워지는 것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키오스크의 글씨는 작고, 단계는 많고, 오류 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구조는 냉담하다. 실수 한 번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 줄은 뒤에서 길어지고 시선은 등에 꽂힌다.

물론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기업들이 고령 친화 키오스크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글자를 키우고, 단계를 줄이고, 직원 호출 버튼을 함께 두는 방식이다. 방향은 맞다. 그러나 보급 속도에 비하면 이 같은 배려는 아직 예외에 가깝다. 다수결의 편의가 소수의 불편을 구조적으로 밀어낼 때, 그것은 설계의 문제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누가 쓰기 편하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기술은 누군가를 포함하고 누군가를 배제한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가장 빠른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가장 느린 사람이 얼마나 존엄하게 일상을 살 수 있느냐로 가늠된다. 패스트푸드 한 끼를 시키는 일조차 혼자 해낼 수 없다는 무력감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사람을 작아지게 만든다.

급할 이유가 없는 속도가 있다. 인간의 존엄이 그 속도에 걸려 있을 때는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