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구군의 어느 어르신은 통장 하나를 정리하려면 반나절을 써야 한다. 한국금융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양구군·전남 신안군·경북 김천시 등 일부 지역 주민들이 은행 창구를 찾기 위해 이동해야 하는 거리는 편도 평균 26~27킬로미터. 왕복으로 치면 50킬로미터가 넘는다.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무릎을 구부려 좌석에 앉고, 다시 한 시간을 걸어야 겨우 닿는 창구 앞에서—그 어르신이 마주치는 것은 번호표가 아니라, 자신이 이 나라의 금융 시스템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은행들이 점포를 닫는 속도는 가파르다. 수익성이 낮은 농어촌·소도시 지점부터 순서대로 사라졌고, 그 자리는 앱(App) 알림 하나로 메워졌다. 은행 입장에선 합리적 선택이다. 디지털 전환은 비용을 줄이고 서비스 효율을 높인다. 24시간 접속 가능한 모바일 뱅킹이 주 1회 여는 창구보다 나을 수 있다는 주장을 무작정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전제가 하나 붙어야 한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는 가정. 이 가정이 균열을 일으키는 곳이 바로 고령층이다. 손가락이 굳어 화면 터치가 어렵고, 공인인증서 대신 등장한 각종 생체인증 절차는 낯설고, 보이스피싱 공포가 더해지면 모바일 뱅킹 앱은 편의가 아니라 위협으로 다가온다. 디지털이 불편한 게 아니라, 디지털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앱을 쓰면 된다'는 말은 해법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고령층을 위한 디지털 교육 확대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으로 따라잡는 속도보다 기술이 진화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매년 앱 인터페이스가 바뀌고, 인증 방식이 갱신되는 세계에서 70대 후반의 어르신이 '디지털 시민'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강을 거슬러 오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법은 오히려 반대 방향에 있다. 금융이 사람에게 찾아가야 한다. 우체국 금융망을 적극 활용하거나, 지자체와 협력해 이동식 금융 창구를 운영하거나, 마을 단위 금융 대리점 제도를 정비하는 방식이 이미 논의 선상에 올라 있다. 영국의 '은행 허브(Banking Hub)' 모델—여러 은행이 비용을 분담해 지역 공동 창구를 유지하는 방식—은 수익성과 접근성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검토할 시점이다.
금융 접근성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연금을 수령하고, 공과금을 내고, 자식에게 돈을 보내는 행위—이 평범한 경제 활동에서 배제될 때, 고령층은 단순히 불편함을 겪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립을 잃는다. 왕복 50킬로미터는 거리가 아니라 그 상실감의 척도다.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인 양구의 어느 마을 어르신이 오늘도 버스를 기다린다. 은행 앱이 아무리 빨라져도, 그 버스 정류장에 와 닿지 못한다면—기술의 발전은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