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 출국장, 주말 이른 아침부터 오사카·도쿄 행 탑승구 앞에는 캐리어를 끄는 인파가 길게 늘어선다. 20대 직장인 김모 씨는 「엔화가 싸니까 서울 근교 여행보다 오히려 일본이 더 저렴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체감 물가가 역전된 것이다. 이 '체감'은 통계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은행이 2026년 6월 발표한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2025년 한국의 대일본 여행수지 적자는 57억 540만 달러를 기록했다. 1998년 통계 집계를 시작한 이래 사상 최대치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쓴 돈에서 일본인이 한국에서 쓴 돈을 뺀 결과가 이 수치다. 한 해 동안 57억 달러가 넘는 소비 여력이 국경을 넘어 일본 경제로 흘러들어 간 셈이다.

왜 지금, 왜 이 규모인가

엔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22년 이후 이어진 초저금리 기조와 미·일 금리 격차가 맞물리면서 엔화 가치는 수십 년 만의 최저 수준까지 밀렸다. 달러당 엔화 환율이 한때 160엔을 웃돌았고, 원·엔 재정환율도 100엔당 900원 안팎까지 떨어졌다. 한국인 여행객 입장에서는 1년 전보다 교통·숙박·식비 모두 체감 20~30% 할인된 것과 다름없는 환경이 펼쳐진 것이다.

일본 정부관광국(JNTO)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일본을 찾은 한국인 여행객은 800만 명을 넘어섰다. 코로나 이전 최고치를 가뿐히 넘는 숫자다. 반면 한국을 찾는 일본인 여행객 수와 1인당 소비 규모는 상대적으로 제자리걸음이다. 엔저가 진입 장벽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국 간 관광 흐름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일방통행에 가까워졌고, 그 격차가 역대 최대 여행수지 적자로 응축됐다.

관광만의 문제가 아니다 — 수출 전선의 균열

더 깊은 문제는 수출 경쟁력이다. 한국과 일본은 반도체 장비·자동차·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제3국 시장을 두고 겹치는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엔저 국면에서 일본 기업은 원가 부담을 줄이거나, 달러 표시 가격을 내리지 않고도 환차익을 누리는 방식으로 수익성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 원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거나 강세일 때 한국 수출 기업은 이중 압박을 받는다.

무역업계에서는 「엔저가 장기화될수록 일본 경쟁사가 단가를 공격적으로 낮출 여지가 생기고, 중간재 수입 구조가 복잡한 한국 기업은 환율 대응 속도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자동차·부품, 일부 기계류 분야에서 한·일 기업이 경합하는 동남아·중동 시장의 수주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 업계 안팎에서 제기된다.

물론 모두가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부품·소재를 수입하는 한국 제조업체 일부는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일본산 원자재를 활용할 수 있다. 일본 현지에 생산 거점을 둔 기업도 원가 절감 효과를 누릴 여지가 있다. 그러나 수혜는 제한적이고 구조적이지 않다. 이익을 보는 기업이 있는 만큼, 직접 가격 경쟁에 노출된 수출 기업이 입는 타격이 더 넓고 지속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구조적 불균형, 언제까지 이어지나

시장은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속도에 주목한다. BOJ가 정책 금리를 꾸준히 올려 미·일 금리 격차가 줄어들면 엔화는 반등할 수 있다. 실제로 2024년 하반기 BOJ의 소폭 인상 결정 직후 엔화가 일시적으로 강세로 돌아선 적도 있다. 그러나 일본 내 소비 심리와 물가 불안정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BOJ가 인상 속도를 급격히 높이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국 입장에서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도 없고, 일본의 통화정책을 바꿀 수도 없다. 결국 고부가가치 제품과 기술 차별화로 가격 경쟁에서 벗어나는 구조 전환, 그리고 관광수지 불균형을 메울 수 있는 외국인 유치 다변화 전략이 현실적 대응 경로로 거론된다. 57억 달러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엔저가 한국 경제의 어느 곳을 얼마나 깊이 파고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물 청구서다.